‘명량’이 온갖 흥행기록을 갈아치우며 개봉 15일 만에 1200만 관객을 돌파하면서, 사실상 현재 최고기록인 ‘아바타’의 1362만 관객을 넘어설 것이란 것이 기정사실화 되고 있습니다. 좌석점유율역시 80%를 넘나들 정도로 엄청난 기세입니다. 이것은 극장 측에서 상영관을 몰아주기 이전에 그만큼 관객이 자발적으로 관람을 원해서 흥행을 했다는 뜻이겠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증식하듯 늘어나는 명량의 상영관이 다른 영화들의 정상적인 상영을 방해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이순신 장군으로 영화계가 시끌시끌한 와중에 조용히 첩보 영화 ‘모스트 원티드 맨’이 개봉했습니다. 많은 분들이(명량의 관객 수 앞에선 많다는 말이 무색하긴 합니다) 필립 세이무어 호프만의 마지막 연기를 보기 위해, 그리고 ‘팅커 테일러 솔져 스파이’ 이후 새로운 존 르 까레 원작의 묵직한 첩보 영화를 기대 하며 개봉을 고대하던 영화였습니다.

영화는 영화 외적인 측면에서, 세 인물의 힘에 의해 움직이고 있습니다. 먼저 동명 원작 소설의 저자인 존 르 까레와 영화를 연출한 감독 안톤 코르빈, 그리고 마지막으로 주연배우 필립 세이무어 호프만까지, 이 세명의 힘이 이 영화를 이끌어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영화의 원작 소설의 저자인 존 르 까레는 <추운 나라에서 온 스파이>, <팅커 테일러 솔져 스파이>등으로 유명한 첩보소설 계의 거장입니다. 실제로 젊은 시절 영국 정보부에서 첩보활동을 했던 그는, 그 경험을 살려 첩보소설을 쓰기 시작했고 여든을 넘은 나이에도 예리한 감각으로 여전히 집필활동을 활발하게 하고 있죠. 그의 첩보소설은, 일반적으로 스파이를 다룬 창작물들과는 다르게 사실적인 묘사와 설정을 기반으로 고단한 첩보원들의 내면을 탁월하게 펼쳐 보입니다. 리얼리즘의 외피를 입은 첩보원들은 단순한 장르소설의 도구적인 인물에서 벗어나 인간 본연의 의문을 날카롭게 파고듭니다. 그래서인지 그의 소설은 스산하고, 물에 잔뜩 머금은 솜처럼 묵직하고 밀도 높은 피로감과 함께 짙은 안개가 주변을 감싸고 있는 듯한 적막한 분위기가 감돕니다. 그리고 그 원작의 힘은 ‘팅커 테일러 솔져 스파이’와 이 영화 ‘모스트 원티드 맨’에도 그대로 나타납니다.

영화의 시작인 무슬람 청년 이사의 함부르크 밀항 장면부터 주인공 군터가 분노와 체념의 복합적인 감정 속에서 차 문을 열고 도로로 나서는 마지막 장면까지, 영화는 내내 현실세계보다 배는 많은 중력이 짓누르듯 무거운 어깨와 (많은 담배연기와) 무채색의 밤 풍경을 닮아 한기가 도는 햇볕 같은 것들이 가득 차 있어 존 르 까레의 소설 세계를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모습입니다. 이 점은 같은 작가의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 ‘팅커 테일러 솔져 스파이’와도 유사해서, 아마도 ‘팅커 테일러 솔져 스파이’를 인상깊게 보셨으면 이 영화 역시 입맛에 맞으실 것입니다.

이런 영화의 분위기엔 감독 ‘안톤 코르빈’의 독특한 경력도 한 몫 할 것입니다. 사실 안톤 코르빈 감독은 네덜란드의 포토그래퍼이자 뮤직비디오 감독으로서 손에 꼽을 정도로 유명한 작가입니다. 디페시 모드, 너바나, U2, REM 등의 앨범 재킷과 뮤직비디오로 이미 명성이 자자했었죠. 그러다 2008년에 이르러 그는 그와 작업을 함께 했었던, 23세의 나이에 자살로 세상을 등진 조이 디비전의 멤버 이언 커티스의 삶에 대한 영화 ‘컨트롤’을 연출하며 영화감독으로써 늦깎이 데뷔를 합니다. 데뷔작임에도 아름다운 흑백 영상과 담백한 연출로 평단의 호평을 받았습니다.

‘모스트 원티드 맨’은 데뷔작 ‘컨트롤’ 이후 조지 클루니가 은퇴를 바라보는 암살자 역할로 주연을 맡은 ‘아메리칸’을 지나, 안톤 코르빈 감독의 세번째 연출작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스크린에 펼쳐놓은 존 르 까레의 세계는 굉장히 매력적입니다. 전작 ‘아메리칸’에서 느슨하고 맥이 빠진 연출을 보여줬던 것과는 달리, 묵직하고 뚝심있는 연출력을 보여줍니다. 아마도 원작자인 존 르 까레와 주연인 필립 세이무어 호프만의 영향도 있겠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걸 제대로 활용할 수 있는 감독은 그리 많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이 영화의 주제는, 냉전 시대의 첩보원들이 갖고 있던 사명감과 충성심, 명예, ‘주적(主敵)’이 있음으로서 부여되는 목적의식 같은 것들이 사라진 포스트-냉전시대, 9/11테러 이후의 적과 아군이 모호해진 세계에 대한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영화의 톤이나 연출방식이 중요할 수 밖에 없습니다. 안톤 코르빈 감독은 분명 컬러영상인데도 불구하고 흑백의 톤을 느낄 수 있는 묘한 영상과 가랑비에 옷이 젖듯 조금씩 스릴과 피로를 쌓아가다 마지막에 한순간에 불완전연소되는 군터라는 인물을 통해 적도 아군도 없는 시대의 첩보원들의 세계를 효과적으로 연출해냈습니다.

마지막으로, 존 르 까레의 훌륭한 원작과 안톤 코르빈 감독의 인상적인 연출 속에서, 필립 세이무어 호프만이라는 배우가 있습니다. 그가 연기한 거의 모든 역할이 그렇듯 여전히 배가 불룩하고 옅은 금발을 정돈 된 듯 안된 듯 나부끼며 스크린을 종횡무진 활보합니다. 그가 연기한 군터 바흐만은 독일 정보부 산하 비밀조직의 수장으로써, 냉철한 이성으로 그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인물입니다. 그를 엿먹일지도 모르는 동료들과 미국 정보부 요원들이 그의 행동에 제동을 걸기도, 도움을 주기도 하지만, 그들도 각자 신념에 따라 움직이고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다른 이들이 눈 앞에 보이는 위험요소를 처리하려는 근시안적 사고를 가진 데에 비해, 군터는 좀 더 큰 그림을 그리며 테러조직의 수뇌부를 노립니다. 그 바탕엔 적과 아군을 명확히 구분할 수 없는 시대에, 무슬림 청년 ‘이사’나 테러조직에 도움을 주면서도 기부활동에 열성적인 ‘압둘라 교수’같은 인물들에 대한 인도주의적인 시각도 존재하고 있습니다.

군터 바흐만은, 탈냉전시대에 유명무실해진 각국의 정보전 틈바구니에서 첩보원으로서 정체성을 고뇌해온 인물입니다. 베이루트에서 작전을 망치고 (미국 측의 잘못이었지만) 동료들이 수도 없이 희생되는 것을 보며 대체 자신들이 무엇을 위해 일하는 것인지에 대한 혼란에 빠졌죠. 냉전이 끝나며 많은 가치들이 사라지고 부서지고 재편성되었습니다. 국가의 이익과 안위를 위해 목숨을 걸었던 첩보원들은 이젠 더 이상 적이 누군지, 국가에 이익이 되는 일이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 일련의 사건을 겪으며 군터 바흐만은 탈냉전시대의 첩보원으로써 신념을 다져갑니다. 다름 아닌 첩보원의 역할이 ‘좀 더 안전한 세계’를 만들기 위한 것이라는 신념이죠.

필립 세이무어 호프만은 이런 복잡한 인물을 그 감정이 눈에 잡힐듯이 세밀하게 연기합니다. 그가 빼어무는 담배와, 흐트러지는 머리카락이나 잠시 멈추는 손가락 같은 것들이 그의 내면과 직결됩니다. 딱히 말이 많은 캐릭터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영화가 끝나고 나면 그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은 것 같은 기분이 됩니다. 어쩌면 이젠 그의 연기를 볼 수 없기에 더 그렇게 느낄 수도 있겠습니다만, 여전히 그는 스크린 안에서 영화를 장악하고 있고 무서우리만치 인물을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었습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군터가 이사와 압둘라를 속수무책으로 넘겨주고 나서 화를 감추지 못하고 씩씩대던 실루엣이 오랫동안 뇌리에 남습니다. 턱을 내밀고 한참이나 숨을 몰아쉬던 모습이, 대배우로 인정받고 나서도 일이 끊길까봐 노심초사하며 살았다는 그의 성격만큼이나 인생에 잔뜩 화가 난 것 같이 보였습니다. 여전히, 그리고 영화에 대한 생각이 들 때면 언제나, 그의 연기를 보지 못 한다는 사실이 슬플 것입니다.

‘모스트 원티드 맨’은 ‘팅커 테일러 솔져 스파이’ 못지 않게 훌륭한 첩보영화입니다. 전자는 조금 더 건조하고 단순한 플롯을 따라 묵직한 드라마를 보여주고, 후자는 조금 더 세련되고 감성적이며 미로와 같은 플롯으로 스릴을 느끼게 하죠. 아마도 각자 묘사한 시대상과도 결부되는 성격이 아닌가 싶습니다만, 취향에 따라 호불호의 차이는 가릴 수 있을 지 언정 존 르 까레의 정서가 풍기는 첩보영화에 매력을 느끼는 관객이라면 우열을 가리기 힘들 것입니다. 필립 세이무어 호프만의 마지막 연기를 볼 수 있다는 점 역시 굉장한 메리트입니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현재 명량의 기세로 상영극장과 맞는 시간대를 찾기가 손에 꼽을 정도라는 것이겠죠.


※필자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글 : 이해웅(http://yarkteim.blog.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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