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여름 한국 영화계처럼 뜨거웠던 적이 있나 싶을 정도로, 네편이나 되는 대작이 시간차를 두고 연달아 개봉했습니다. 마지막 영화인 해무까지 개봉하고 나니, 적어도 네편 중에 수준 이하의 영화는 없었다는 것이 그만큼 우리나라 영화계가 얼마나 성장했는지 알 수 있는 여름시즌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명량’의 초대박 흥행의 영향은 좀 더 두고봐야 알겠습니다. (앞으로 관객이 이천만에 육박하는 영화나 또 나올 수 있을까 싶습니다만) 개인적으로 이런 거대한 영화가 갖는 영향력에 대해 비관적인 시각을 갖고 있어서 우려가 되긴 합니다만.

여름 대작 릴레이의 마지막은 영화 ‘해무’가 맡았습니다. ‘살인의 추억’ 등에서 봉준호 감독과 함께 작업했던 심성보 감독이 연출하고 봉준호 감독이 제작을 맡아 개봉전까지 화제를 끌었습니다. 앞서 개봉한 세 영화와 달리 사극이 아니고, 상대적으로 적은 제작비에 청소년 관람불가 판정을 받은 영화라 사실 앞선 세편과는 판이한 성격을 가진 영화입니다. 주연급에 아이돌 출신인 박유천씨를 캐스팅해서 우려의 목소리도 많았습니다만, 뚜껑을 열어보니 우려와는 달리 상당히 좋은 연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1998년 여수 앞바다, IMF가 터지고 어선들도 하나둘씩 폐선하는 추세입니다. 한 때 잘나가던 전진호의 선장 철주(김윤석) 역시 폐선을 하자는 권유를 받고 있지만 생사고락을 함께한 배와 선원들을 내칠 수가 없습니다. 나날이 조획량은 줄어가고, 대출도 받을만큼 받았고, 아내는 바람이나 피고 앉아있고, 결국 철주는 최후의 수단을 쓰기로 합니다. 밀수를 돕기로 하는 것이죠. ‘뱃사람이니 바다에서 먹고 살아야 할 것 아닌가’

하지만 엉겁결에 밀수가 아니라 밀항을 돕게 됩니다. 어차피 물건이나 사람이나 여기서 저기로 옮기기만 하면 되는 것 아닌가하는 생각이었지만, 결국 그의 판단이 전진호의 선원들을 참혹한 사건의 소용돌이로 밀어 넣게 됩니다. 선원들은 밀항을 돕기로 했다는 갑판장 호영(김상호)의 말을 듣고 탐탁치 않게 생각하지만 선금을 받고는 모두 함구합니다. 전진호의 선원은 선장과 갑판장을 포함해 기관장 완호(문성근), 롤러수 경구(유승목), 선원 창욱(이희준)과 막내 동식(박유천)까지 총 여섯입니다. 티격태격할 때가 종종 있어도 서로 가족처럼 끈끈한 사이죠.

영화는 그 ‘사건’이 터지기 전까지 아주 유려하게 흘러갑니다. 특유의 인간에 대한 냉소적인 시각 속에서도 여섯명의 캐릭터를 잘 조율하며 전진호 안의 모습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죠. 특히 오프닝 시퀀스는 각 캐릭터의 성격을 많은 대사가 없이도 아주 강렬하게 보여줍니다. 근래 한국영화 오프닝 장면 중에서 가장 인상적이지 않나 싶을 정도로요.

원작 연극을 각색한 영화이기에 연극 무대 같은 기분을 영화를 보는 종종 받게 됩니다. 특히 영화 초반과 엔딩 시퀀스를 빼고는 모두 전진호 안에서만 영화가 진행되기 때문에 그 폐쇄감은 더하죠. 그것을 그대로 영화 스크린에 옮기면 폐소공포증에 걸릴 정도로 더 갑갑해지기 마련인데, 영화는 그런 공포를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편입니다. 시종일관 안심할 수가 없는 셈이죠. 그러면서도 종종 바다의 전경을 을씨년스럽게 와이드하게 촬영하여 영화만이 가질 수 있는 장점도 함께 취하고 있습니다. 특히 몇 장면 없는 원경 씬이 유독 마음에 남았습니다. 마지막의 해변에서 동식을 넓게 잡는 장면 역시 그에게 남은 공허함과 살아남았다는 안도감 같은 감정을 잘 보여줘서 좋았구요. 끝없이 넓은 바다와 전진호 안의 닫힌 공간의 대비를 통해 전달하는 감정이 영화를 더욱 깊이있게 만들어줍니다.
그들의 운명을 바꾸는 사건이 터지고 영화는 클라이막스를 향해 가파른 길을 타고 내려가기 시작합니다. 선장 철주의 광기가 폭발하고 각 인물들의 캐릭터가 항성을 잃은 행성들처럼 폭주하여 서로 부딪힙니다. 그런데 그 이전까지 관객을 몰입시키며 밀도있게 흘러가던 영화는, 이 시점에 이르러 그 장점을 잃어버립니다. 긴장감과 공포와 스릴은 있지만,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왜 저런 행동을 하는지 그 이유는 알고 있지만 그게 마음에 와닿지는 않습니다. 사건이 터지고 전진호가 침몰할 때 까지 선장과 선원들의 행동이 너무 급작스럽게 변하기 때문이죠.

그렇게 전반부에 잘 쌓아놨던 캐릭터와 영화의 분위기는 종반에 이르러 그 매력을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끝나게 됩니다. 영화가 품고 있던 인간성에 대한 의문도 유야무야되는 모습입니다. 오히려 열연을 보여준 배우들의 모습이 안타까워 보일 정도로 말이죠. 러닝타임을 좀 더 할애하여 사건이 일어난 후의 조금씩 어긋나는 선원들의 모습에 좀 더 보여주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물론 그랬다면 지금과 같은 답답할 정도로 꽉 들어찬 밀도감을 얻어내지는 못했겠죠.

해무에서 가장 인상깊은 점이 있다면 역시 배우들의 연기일 것입니다. 김윤석씨의 연기는 여전히 스크린을 가득 메웁니다. 황해나 화이에서 볼 수 있었던 악한의 모습이지만, 각각의 캐릭터가 가지고 있는 기반에 따라 디테일하게 구분되어 있습니다. 특히나 해무의 철주란 캐릭터는 호인이자 의인이었던 한 인간이 작은 균열로 어떻게 악마가 되어가는 지를 보여주는 인물이기에, 어떤 선천적인 속성으로 황해나 화이의 그가 맡은 인물들이 악을 품고 있었던 것과는 차이가 있죠. 그것을 세심하게 살릴 줄 아는 배우는 김윤석씨를 비롯해 몇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선원들의 연기 또한 한명도 아쉬움이 없을 정도로 출중합니다. 우려가 되었던 박유천씨의 연기도 굉장히 자연스럽습니다. 오히려 독립영화에서 많이 봐왔던 마스크처럼 친숙하고, 스크린에 잘 들어맞는 연기라고 생각합니다. 문성근씨와 김상호, 유승목 씨의 연기도 역시 빠지는데 없이 훌륭했구요. 특히 선원 중 이희준씨의 연기가 인상깊었는데, 그의 캐릭터가 독특한데도 있었지만 그 맛이 간듯한 눈매는 그가 평소와 연기하던 캐릭터들과 전연 딴판인데도 소름 돋을 정도로 완벽하게 소화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한예리씨가 연기한 홍매는, 사실상 해무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캐릭터가 아닌가 싶습니다. 군도 때에도 짧지만 맛깔나는 연기를 보여주었지만, 해무에서의 홍매는 정말로 매력적인 인물로 다가옵니다. 단순히 매력적인 캐릭터인 것을 떠나, 한예리씨의 연기로 인해 설득력을 잃어가던 전진호 안의 사건들이 큰 울림으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특히 절망적인 상황에서 동식과의 정사를 벌이는 장면은, 뜬금없을 수도 있는 타이밍이었지만 둘의 연기로 오히려 더 애틋하고 아름다운 장면이 되었습니다. 한예리씨가 앞으로 맡을 배역들이 굉장히 기대됩니다.

아무래도 원작 연극을 옮기는 과정에서 영화적인 완성도와 연극으로써의 정체성이 충돌하여 조금은 애매한 결과물이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영화로 옮기기엔 좀 심심한 각본이지 않았나 싶기도 하구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장면들과 배우들의 호연으로 인해 독특한 분위기가 매력적인 영화입니다. 단일한 매력으로만 따지만 여름에 개봉한 네편 중에서 가장 진흙 속의 진주처럼 빛나는 영화가 아닌가 싶습니다. (가장 작은 영화이기에 더 애정이 가기도 하구요.) 어느새 가을이 슬그머니 문 안으로 발을 들이미는 이 때에 마지막 더위를 이기며 등골이 서늘하게 즐길 수 있는 영화, 해무입니다.



※필자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글 : 이해웅(http://yarkteim.blog.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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