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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전 IP, 23년 전 '첫 추억'에게 보내는 편지
길용찬 기자 | 승인 2018.11.05 15:44

언제나 추웠습니다, 당신을 만나는 날은. 이번에도 찬바람 부는 날씨에 새로 찾아온 당신을 보고 긴 인사를 보냅니다. 수많은 사람과 간판이 스쳐 지나가는 이 거리에서 우리는 참 오래도 만났습니다.

생애 첫 컴퓨터를 사고, 어떤 게임을 해도 새롭고 신기하던 꼬꼬마가 있었습니다.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어느 게임잡지에서 당신 이름을 처음 봤습니다. 와, 국산 최초 SRPG 대작이라니. 출시일에 맞춰 엄마를 졸라 동네 세진컴퓨터랜드를 찾아갔습니다. 지금은 저장 아이콘으로만 볼 수 있는 3.5인치 플로피 디스크 10장. 당신의 첫 모습이었죠.

지금 그때처럼 당신과 놀라고 하면 절대 못할 겁니다. 그때는 어떻게 그 수많은 버그에 힘들어 하지도 않고 빠져들었을까요. 돌이켜보면 태반은 버그인 줄도 모르고 놀았던 것 같네요. 여러 단점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이야기는 지나치게 매력적이었습니다. "창세기전 2에서 이어집니다" 라는 엔딩 화면이 뜰 때까지.

창세기전(1995), 창세기전2(1996)

당신의 두 번째 작품이자 첫 완성판이 바로 1년 뒤, 1996년 12월이었죠. 스스로도 기억하고 있겠죠? 자신이 가장 빛나는 시절이었다는 것을. 주변 모든 이들이 당신을 좋아했고 칭찬했답니다. 당신이 들려준 이야기는 마지막까지 감동적이었고요. 

가장 기억나는 전투로는 흑태자로 라시드와 치른 고난이도의 해전이 있었는데, 그렇게 말하면 20년 넘게 지난 지금도 알아듣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에 신기함을 느낍니다. 한 유명 연예인은 며칠 전 공식 석상에서 어릴 적 엔딩 보고 펑펑 울었다고, 인생게임이라고 말하더라고요. 당신은 히트작을 넘어서 그 세대 한국 게이머의 공감대였습니다. 

창세기전 외전: 템페스트(1998)

2년 뒤부터는 또 다른 무대에서 만날 수 있었죠. 서풍의 광시곡은 사실 작품 자체가 매력적적으로 다가오진 않았습니다. 좀 많이 무겁고 패턴이 단조로웠거든요. 하지만 당신은 비주얼의 발전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었어요. 

템페스트는 독특한 맛이 있었어요. 연극 무대 형식의 전투 화면이나 육성 요소도 신선했고, 일본에서 데려온 일러스트레이터의 그림도 예뻤고. 그런데, 같이 엔딩 보자는 고백을 인간적으로 너무 튕긴 것 아닌가요? 예전부터 그래왔지만 여기선 정말로 화가 났어요. 엔딩 직전에서 열 번은 차였을 겁니다. 당신 참 쉽지 않은 스타일이었죠.

창세기전3: 파트2(2000)

그간 세월을 되짚었을 때, 우리의 이정표는 여기서 세워졌을지도 모릅니다. 3편의 첫 파트와 둘째 파트 이야기입니다. 완전히 다른 계층의 팬이 생겨난 시기이기도 하죠. 당신은 자기 자신을 가장 잘 파악한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게임성으로 불리는 전략성, 프로그래밍, 밸런스는 더 충실한 스펙을 갖춘 대상이 많았어요. 하지만 당신에게 애정을 준 사람들이 빠져든 계기는 당신이 갖고 있는 이야기, 그림, 목소리였거든요.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하나로 묶기란 참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매듭지을 끈이 필요했던 당신은 우주 공간까지 나아가면서 뫼비우스의 띠를 가져오기도 했죠. 비록 그 매듭은 좀 아니라는 친구들의 절규도 몇 있었지만, 최선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대서사시의 완결은 어떤 방법으로도 쉽지 않으니까요.

"당신을 다시 한 번 만나고 싶습니다" 라는 베라모드의 마지막 독백은 사실상 팬들의 심정을 상징하는 문구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나이를 먹어가면서 각자 길로 나아갔고, 기약 없는 기다림을 가져야 했습니다. 이름도 모르는 어느 장소, 어느 때에서.

4LEAF 내부 보드게임 '주사위의 잔영(2001~2004)'

포리프 월드에서 주사위를 굴리며 놀던 시절은 기억나나요? 살라딘 등 강캐로 플레이하다가 모두가 똑같은 조합인 것에 회의를 느끼고 네리사-슈-바이올라라는 스피드 몰빵 엽기소녀 조합으로 놀던 시기는 제 게임인생에서 손꼽히는 즐거운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창의력 빛나는 청소년이었고, 마지막으로 빛난 당신이었습니다.

그 다음부터... 길게 말하지 않는 편이 서로에게 좋겠죠. 많은 일이 있었고, 혹은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아무 일이 없는 시절이 조금 더 나았습니다. 당신이 낸 정식 넘버링 '4편'은 1년을 버티지 못했습니다. 그밖에도 모든 시도가 무너졌지요. 긴 시간 동안 우리는 조금씩 멀어졌습니다. 거의 타인이라고 느낄 정도로.

각자의 삶을 살면서 여러 속사정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당신이 들려준 이야기 중에는 당신 것이 아닌 경우도 있었습니다. 집안 사정을 어디 말도 못하고 속앓이하다 무너져내렸던 과거도 알았습니다. 당신 스스로 부끄러웠던 일, 그리고 의지와 상관없이 옥죄던 환경. 많은 할 말이 머리에서 맴돌았고, 그래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에는 그렇게 되는 순간이 가끔씩 오기 마련입니다.

창세기전: 안타리아의 전쟁(2018~)

사는 곳을 옮겼다는 소식은 그 뒤에 들었습니다. 예전 작품들이 새롭게 단장해서 나올 것이라고, 또 작지만 간편한 공간에서 새로 인사하게 되었다고. 오랜 기다림 끝에 몇 주 전, 휴대폰 화면에서 오랜만에 당신을 만났습니다.

당신, 정말 많이 변했더군요. 다른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 당연한 일이고 이해합니다. 저나 당신이나 너무 많은 시간이 흘렀고 세상은 바뀌었으니까요. 조금 이야기하다 보니 내실에 충실하다는 것도 알게 됐습니다. 하지만 지금 유행하는 스타일을 급하게 껴입은 옷맵시는 조금 아깝기도 했습니다. 분명 당신만 첨가할 수 있는 포인트 장식도 많았을 텐데요. 

그래도 오래 잘 살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다들 비슷하게 말하더라고요. 옛날 게임이 그리운 게 아니라 그 게임을 하던 시간이 그리운 것이라고. 두 글자로 줄이면 '추억'이라고 합니다. 디스켓 열 장 인스톨을 기다리면서 느낀 설레는 감정은 아마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겁니다. 그때의 게임을 다시 해볼 수는 있지만, 그 시간에 있던 저는 이제 없으니까요.

시간과 기억이 합쳐지면 추억이 됩니다. 어릴 적 첫 감정과는 많이 다르지만, 23년이라는 시간 동안 우리는 각자의 이야기를 겪으면서 다른 장소에 와 있습니다. 리메이크로 다시 만나는 날에 바라는 점이 하나 있습니다. 부디 옛 모습 그대로 돌아오진 말아주세요. 현재를 사랑할 때 추억 역시 우리가 원하는 모습으로 오롯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길 바랍니다.

당신에게만 애정을 준 것도 아니었습니다. 솔직히, 그 사이 더 좋아한 상대도 참 많았고요. 하지만 이렇게 긴 편지를 쓴 이유는 당신이 아직 살아 있어서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살 날이 많이 남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달라졌든, 앞으로 어떤 풍파가 오든, 다 이겨내고 멋지게 살아가길 빕니다. 

당신을 다시 한 번 만나서 반갑습니다.

2018.11.5
어느 24년차 게이머

 

길용찬 기자  padak@gameinsigh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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