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황금돼지’ 열풍을 몰고 왔던 돼지의 해가 ‘기해년’(己亥年)으로 12년 만에 돌아왔다. 

과거 ‘꾸러기 수비대’에 익숙한 유저라면 기억할텐데, 국내를 포함한 중국, 일본 등 아시아 문화권은 육십갑자에 의해 매년 해를 상징하는 동물이 바뀌었다. 때문에 지난해 ‘무술년’(戊戌年)을 상징한 개에 이어 돼지가 2019년을 상징하는 마스코트로 활약할 전망이다. 

전통에 의해 선정된 마스코트인 만큼 현대 사회에 통용되지 않은 문화라고 생각될 수 있으나 장르와 분야를 떠나 올해의 동물은 매년 신년 이슈의 한 꼭지를 장식해왔다. 특히, 2007년 정해년(丁亥年)의 경우 ‘황금 돼지의 해’로 보도되면서 관련 액세서리 출시와 함께 출산율 상승까지 기대할 만큼 거대한 파급력을 가진다. 

이처럼 돼지의 이미지는 풍만한 살집과 부위로 대중적인 인기를 끌어, 부정적인 이미지보다 물질적인 풍요로움과 여유, 출산 등을 상징하곤 했다. 게다가 오래전부터 닭과 함께 뛰어난 가성비로 유저들의 단백질 공급을 책임져온 만큼 대중들에게 보다 친숙한 이미지로 다가왔다. 

또한 돼지는 식탁뿐만 아니라 동화와 애니메이션, 영화 등에서도 활약했는데 게임에서도 특유의 이미지를 부각해, 복합적인 면모를 드러냈다. 몇몇 게임의 경우 돼지가 가진 기존의 귀여운 이미지에 이어 역겨운 냄새, 더러운 우리, 맹목적으로 사육되는 아둔함으로 원초적인 공포를 재현하기도 했다. 

신년을 맞아 국내외 장르를 가리지 않고 게임에서 활약한 돼지와 관련 인물들을 대해 짚어봤다. 

<몬스터 최고참 - 메이플스토리의 돼지>
슬라임, 주황 버섯과 함께 게임의 시작을 알렸던 돼지는 초창기 메이플스토리 유저라면 잊을 수 없는 추억의 몬스터다. 게임의 독특한 2D 도트 그래픽에 어울리는 디자인과 점프까지 가능한 현실을 초월한 움직임으로 유저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줬다. 

특히, 과거 ‘돼지의 리본’ 수집 장소로 이름을 날렸던 ‘돼지의 해안가’의 경우 압도적인 돼지의 물량과 함께 강력한 몬스터 ‘아이언보어’가 등장해 요령이 필요한 사냥터로 이름을 날렸다.  

전사 마을 ‘페리온’의 혹독한 환경을 상징하는 ‘와일드 보어’도 돼지 라인업에 빼놓을 수 없는 몬스터다. 과거 유난히 수집 퀘스트와 관련이 많았던 돼지 몬스터들은 귀여운 이미지로 가볍게 여겨지는 경우가 많았는데, 와일드 보어의 경우 후퇴를 모르는 호전성으로 근접 캐릭터의 원망을 사곤 했다. 

메이플스토리의 용사라면 돼지 정도는 가볍게 제압해야 할 것 같지만 캐릭터의 비율과 이동속도를 생각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아기자기하게 표현됐지만 큰 몸집을 지니고 온몸에 갑옷에 불꽃까지 두른 돼지가 유저와 맞먹는 속도로 달려오는 셈이다. 이쯤 되면 돼지 퇴치에 용사의 손까지 빌려야 했던 마을 사람들의 마음을 이제는 이해할 수 있다. 

<버릴 요소 없는 돼지들 - 푸기, 도스팡고, 불팡고> 
하늘과 땅을 넘나들고 전기, 불, 얼음, 바람 등 못 뱉는 원소를 찾는 것이 빠를 정도로 흉포한 용들 사이에서 ‘푸기’의 존재는 헌터에게 있어 영원한 안식처라고 할 수 있다. 함께 전투에 참여하는 아이루와 달리 어떠한 전술적 이득도 없지만 오발탄으로 유저를 날려버리는 경우도 없으니 그야말로 완벽한 ‘반려동물’인 셈이다. 

아이루, 메라루, 차차브 등의 수인족들은 부족을 이루거나 사냥을 하며 인간다운 삶을 누리는 반면 푸기는 말 그대로 돼지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왠지 몬스터헌터 세계관 동물의 기본 소양일 것 같은 이족보행도 못하고 퀘스트에 데려갈 수도 없지만 폭넓은 코스튬으로 아이루와 함께 귀여움의 양대 산맥을 책임지는 독보적인 캐릭터로 자리 잡았다. 

찹쌀떡 마냥 말랑말랑할 것 같은 푸기지만 매 시리즈마다 나름대로 엄격한 심사를 거쳐 자신의 동반자를 선정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마을에서 방황하는 초보 헌터에게 다가가 정중하게 놀아줄 것을 요청하는데 리듬게임처럼 배경음악에 맞춰 환상적인 손놀림으로 푸기를 만족시키면, 비로소 유저를 동반자로서 인정한다. 

반면 푸기의 귀여운 모습으로 인해 ‘몬스터헌터의 돼지는 안전하다’라는 인식을 완벽하게 깨버리는 불팡고와 도스 팡고도 초반 구간 무시할 수 없는 몬스터 중 하나다. 메이플스토리의 와일드 보어를 3D로 옮겨놓은 듯한 비주얼과 브레이크 없는 공격성은 비룡의 알 운반 퀘스트를 진행하는 헌터들에게 공포의 대상이다. 

물론 푸기가 아이루와 함께 몬스터헌터의 마스코트를 맡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캐릭터를 공격하지 않고 무엇보다 독보적인 귀여움을 자랑한다. 하지만 냉혹한 야생을 헤쳐나가는 헌터는 어떻게 생각할까. 푸기처럼 포근하게 안아주지는 못해도 대검으로 몇 번 쓰다 듬어주면 가죽에 고기까지 제공하는 불팡고가 더 매력적으로 보이진 않을까?

<돼지와 영혼을 나눈 파일럿 - 세주아니, 호그라이더>
리그오브레전드 유저들은 100종이 넘는 챔피언 중에서 가장 훌륭한 돼지를 뽑자면 망설임 없이 세주아니의 ‘브리슬’를 고를 것이다. 언뜻 보면 곰으로 착각될 만큼 거대한 크기를 자랑하는 브리슬은 세주아니를 태우고 소환사의 협곡 곳곳을 누빈다. 

스킨에 따라 불곰, 사자, 공룡, 포로 등으로 모습이 달라지긴 하지만 라이엇게임즈는 세주아니의 기본 스킨으로 멧돼지를 선택해, 겨울 발톱 부족의 약육강식 정신을 표현했다. 독특한 점은 브리슬의 돌진 스킬 ‘혹한의 맹습’은 물리 피해가 아닌 마법 피해로 적용돼, 역시 부족의 족장이 타고 다니는 돼지는 보통 돼지들과 근본부터 다르다는 것을 입증했다. 

호그라이더 역시 기존 돼지들이 가진 이미지를 완벽하게 뛰어넘었다는 부분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다. 일반적인 게임에서 돼지들은 뚱뚱하고 게을러 비상식량의 수단으로 인식되기 마련인데 호그라이더의 돼지는 남다른 스피드와 점프력으로 공중 유닛급 기동력을 선보인다. 

게다가 브리슬과 마찬가지로 호그라이더의 돼지는 단순한 짐승이 아닌, 파일럿과 동등한 동료로 대우받을 만큼 뛰어난 지능을 자랑한다. 영상에서 파일럿의 등을 밀어주거나 보드게임을 하고, 심지어 사람의 말로 파일럿에게 조언하는 등 누가 호그라이더의 주체인지 모를 정도로 강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돼지의 탈을 쓴 악마들 - 로드호그, 더 피그> 
돼지들은 뚜렷한 양면성을 지닌 동물이다. 새끼 돼지의 귀엽고 활동적인 이미지도 있지만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등장했던 더럽고 냄새나는 추악한 면모도 돼지의 피할 수 없는 속성 중 하나다.

부정적인 이미지가 워낙 강하다 보니 돼지의 추악한 면모를 캐릭터 콘셉트에 대입하는 경우도 있는데 오버워치의 ‘로드호그’와 데드바이데이라이트(이하 데바데)의 ‘더 피그’가 그 주인공이다. 

어떻게 보면 로드호그는 오버워치 전체를 관통하는 사건인 ‘옴닉 사태’의 무고한 희생자일 뿐이다. 호주 정부와 옴닉들의 협정으로 인해 살 터전을 빼앗긴 로드호그는 폭동을 일으켰고 그 결과 핵융합로가 파괴돼 주변 지역은 방사능으로 오염된다. 고향이 ‘매드맥스’를 연상케 하는 황무지로 변하자 로드호그는 돼지 형태의 가면을 뒤집어쓴 채 환경에 적응했고, 그 과정에서 그의 인간성은 사라지고 말았다. 

가면과 배에 새겨진 돼지 문신, 그리고 궁극기 ‘돼재앙’에서 볼 수 있듯이, 로드호그는 자신의 아이덴티티 중 하나로 돼지를 받아들였다. 도스팡고, 브리슬처럼 자신의  브레이크 없는 파괴 충동을 돼지로 표현했다는 의견과 왕성한 식욕으로 세상을 먹어치우겠다는 해석도 잇따르면서 어느 쪽이든 로드호그의 분노가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꾸지 않는다. 

영화 ‘쏘우’ 시리즈의 팬이라면 데바데의 ‘더 피그’가 좀 더 익숙할지 모른다. 메인 빌런 직쏘의 중심 사상을 관통하는 돼지 가면을 쓴 ‘더 피그’는 생존자를 가축 이하로 바라보는 연쇄 살인마다. 

직쏘와 더 피그 모두 사람을 살해하는 살인마인 것은 맞지만 더 피그의 잔혹함은 스승인 직쏘도 한 수 접어야 할 정도로 가혹하다. 자신의 게임에 참가하는 희생자에게 삶의 가치를 깨달을 수 있는 기회를 시험하는 직쏘와 달리 더 피그는 해결할 수 없는 살인 트랩으로 생존자를 처형한다. 

‘삶의 가치를 모르는 사람은 돼지와 같은 고깃덩어리에 불과하다’라는 메시지를 데바데에서 전달하는 더 피그의 움직임은 언뜻 보면 연약한 여성처럼 보일 수 있으나 그녀가 애용하는 ‘리버스 베어 트랩’을 보면 생각이 달라질 것이다. 

때로는 귀엽게, 때로는 용감하게, 때로는 잔혹하게. 이처럼 게임 속 돼지의 이미지는 마치 팔색조처럼 다양한 만큼 여러 장르에서 캐릭터의 개성을 복합적으로 드러내는데 사용됐다. 장르를 떠나 입체적인 캐릭터의 수명이 긴 만큼 기해년을 맞아, 신규 돼지 캐릭터가 등장해 ‘라전무’처럼 트렌드를 이끌어갈지도 모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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