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에서 제작 배급한 드라마 '킹덤'이 화제다. 1월 25일 공개된 킹덤 시즌1은 해외 여러 사이트에서 높은 평점을 받았고, 국내외 입소문을 타면서 퍼져나갔다. 2개 시즌으로 예정되어 있었는데, 기대 이상 인기에 힘입어 시즌3 연장을 검토 중이라고 전해진다.

킹덤은 서구권 흥행 카드인 좀비 소재에 가상의 조선 시대를 섞었다. 기존 좀비물을 통틀어 손꼽힐 만큼 강력한 설정으로 긴장감까지 살렸다. 좀비 액션뿐 아니라 사회상을 반영하고 풍자하는 정치 드라마로서도 강점을 가졌다.

킹덤이 가진 또 다른 매력은 예상치 못한 곳에 있었다. 이 드라마는 게임을 포함한 다른 콘텐츠가 놓치고 있었던 코드 하나를 상기시켰다. 

'갓'이다.

갓 갓
갓 갓

해외 시청자들은 드라마의 재미 외에도 비주얼, 특히 '갓'에 열광했다. 킹덤 속 인물들이 쓴 모자에 대한 반응은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좀비와 정말 멋진 모자들에 관한 드라마(It's about zombies and really fancy hats)", "아주 좋은 영화인데 최고는 역시 모자", "지금껏 본 적 없는 모자", "이 끝내주는 모자들이 각각 무엇을 상징하는지 궁금하다" 등의 반응이 줄을 이었다.

킹덤의 사극 무대는 단지 신선함만을 위한 소재가 아니었다. 조선 말기 왜곡된 유교 사상과 굶주림과 같은 재난, 재래식 무기가 주를 이루던 환경은 좀비 전파 과정과 서사적 시너지를 이루었다. 

그중 '갓'은 놀라운 발견이었다. 모자 하나만으로 사람의 신분과 직업까지 표현할 수 있다는 조선시대의 특성이 영상물 비주얼로 극대화된 것. 드라마의 미학도 함께 살렸다. 기존 중국과 일본 중심 영상에서는 볼 수 없었던 화려한 색감과 액세서리가 모자를 통해 표현되었다.

공개 1달이 지난 지금 와서 킹덤을 찬양하기 위해 쓴 글이 아니다. 킹덤은 한국 게임에 없던 것을 가지고 있는 한국 드라마다. 이제 질문해보자. 우리 게임 속 문화 표현력은?

임진록2: 조선의 반격 (2001)
임진록2: 조선의 반격 (2001)

게임 속 한국 문화 표현이 중요한 이유는 소위 '국뽕'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 상위 개념 '브랜드'의 필요성을 제기하는 것이다. 과거 중세 유럽 세계관, 그리고 재패니즈 세계관이 문화 이미지에 끼친 영향은 굳이 말할 필요가 없다.

킹덤만 해도 해외 일부 시청자에게서 "아시아 배경인데 왜 닌자와 사무라이가 등장하지 않느냐"는 질문이 나오기도 했다. 그만큼 서구권에게 동양 문화는 일본 배경이 대표적으로 자리잡았고, 일본의 환상을 가지고 동경하는 사람을 일컫는 '와패니즈'가 등장하는 결과를 낳았다.

동양 신비에 대한 환상인 오리엔탈리즘이 중국에서 일본 중심으로 변화한 것은 1990년대 전후 일본 문화산업이 전성기를 달리면서 시작되었다. 전세계로 게임 포함 다양한 매체의 작품이 퍼져나가고, 동양 세계관은 곧 일본풍 세계관으로 서구권에 각인되었다.

백인 주인공과 이소룡 옷과 일본 카타나가 오리엔탈 샐러드처럼 어우러지는 풍경
백인 주인공과 이소룡 옷과 일본 카타나가 오리엔탈 샐러드처럼 어우러지는 풍경

일본 문화 브랜드가 세계적으로 정착한 뒤에는 서양 창작물 중에서도 일본식 동양 세계관을 참조한 경우가 흔했다. 헐리우드에서 이런 시도가 많았는데, 특히 에드워드 즈윅 감독의 '라스트 사무라이'와 쿠엔틴 타란티노의 '킬빌' 등은 대표적 흥행작으로 꼽힌다.

이 세계관은 지금까지도 주요 먹거리로 작용한다. 2017년 출시한 인왕 역시 일본의 판타지 세계관으로 글로벌 흥행을 기록한 게임이다. 출시를 앞둔 세키로, 고스트 오브 쓰시마 등도 비슷한 감성에서 이미지 메이킹을 할 것으로 보인다. 

문화 세계관은 역사뿐 아니라 현재를 소재로도 효과를 발휘한다. 2D 콘텐츠를 좋아하는 세계인들에게 일본의 아키하바라는 각종 콘텐츠의 시장인 동시에 소재다. 그밖에도 일본 제작사들은 많은 실제 배경을 무대로 게임 등 콘텐츠를 흥행시켰다. 그 결과 해외 수많은 마니아들이 '관광 성지'를 찾아와 소비 활동을 벌이고 있다.

아키하바라는 일본의 현재를 구현한 세계관이다
아키하바라는 일본의 현재를 구현한 세계관이다

중세 유럽으로 불리는 유럽 봉건제 시대는 세계사에서 손꼽히는 암흑기로 기록된다. 평민들의 삶은 최악으로 떨어지고, 불만이 권력층으로 향하는 것을 막기 위해 마녀사냥이 유행했다. 왕권과 신권의 알력다툼 속에서 교황 권력 강화를 위해 벌어진 십자군 전쟁으로 수많은 전사자가 발생했다. 인류 최악의 전염병 중 하나였던 흑사병도 이 시기 유행했다.

하지만 유럽 국가들의 문화 지배력이 절정을 달리는 시기, 중세 유럽 세계관은 전세계 문화 콘텐츠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기사도로 대표되는 낭만적 시나리오가 형성되었고, 중세 판타지 및 로맨스는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쓰는 소재다.

문화 브랜드 경쟁력은 국력과 경제력, 그리고 창조력과 연관이 있다. 다만 중요한 전제 조건이 있다. 문화적 세계관이 '낭만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일본 사무라이와 중세 기사 모두 현실에서 절대 정의로운 존재가 아니었지만, 무사도와 기사도라는 낭만적 코드를 부각시켜 해당 문화를 대표하는 캐릭터로 자리잡았다.

브랜딩은 개별 콘텐츠뿐 아니라, 해당 세계관을 공유하는 집단의 평판 전체를 강화한다. 브랜드에 매력을 느끼면 코어 소비자가 생기고, 장기적으로 충성도가 올라간다. 기본적인 홍보 자본을 얻은 채로 시작한다. 대중에게 이미지의 힘은 이성과 이론을 넘어선다. 

요약하면, 잘 만들어진 세계관 브랜드 하나는 몇십 년 이상 유지할 수 있는 소중한 가치가 된다. 그것도 업계 전체에. 

독일 중세문학의 백미로 불리는 니벨룽겐의 노래
독일 중세문학의 백미로 불리는 니벨룽겐의 노래

지금이 중요한 이유는, 지금이 한국 문화콘텐츠 영향력이 어느 때보다 높아지기 때문이다. 아시아의 수많은 인구가 한국 드라마에 열광하고, BTS를 비롯한 한국 음악들이 전세계에 이름을 알린다. 한반도 문명 역사에서 가장 문화 경쟁력이 강한 시기다.

이 시점에 넷플릭스에서 글로벌 흥행을 다진 '킹덤'이 남긴 힌트는 소중하다. 우리만이 내놓을 수 있는 콘텐츠가 존재한다는 것, 이런 시도는 '한국 세계관'을 브랜드로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 시나리오와 디자인은 가장 중요한 열쇠라는 것.

한국 대부분의 콘텐츠 분야에서 이 부분을 설계하는 시도가 있다. 영화, 드라마, 음악, 출판. 한 가지가 빠졌다. 게임이 예외다. 문화콘텐츠 수출액 중 과반을 차지하는 게임이 문화 브랜드에 대한 고민이 가장 뒤떨어져 있다는 것은 지금 게임계의 역설을 보여준다.

최근 국산게임 IP에서 정교한 설정과 고유의 문화가 널리 퍼진 사례는 없다. 우스갯소리로 국산 문화를 다룬 국산 대작은 임진록2가 마지막이었다는 이야기를 들을 정도다. 국산게임에서 한국 고유의 문화 디자인을 발견하는 일은 명절 이벤트 코스튬 판매 정도다.

일러스트나 코스튬에서만 만날 수 있는 것
일러스트나 코스튬에서만 만날 수 있는 것

인디게임 시장은 다양한 시도가 많은 만큼 한국 문화나 역사를 소재로 만들어진 게임도 종종 눈에 띈다. 2014년 삼국 시대를 다룬 전략 게임 삼한제국기나 추리와 역사물을 결합한 비주얼노벨 탐정뎐 등이 작게나마 인지도를 얻었고, 전통설화인 바리공주 이야기를 바탕으로 개발 중인 사망여각도 있다. 

그러나 국내 인디계의 척박한 토양과 맞물려 글로벌 진출까지는 쉽지 않고, 개발 단계부터 난항을 겪는 것이 현실이다. 정부의 게임 예산도 예나 지금이나 가상현실이나 증강현실 등 신기술에 몰려 있고 다양한 시도를 지원하지 못한다는 지적이 많다. 한편 단독으로 연구 개발이 가능한 대형 게임사들은 다양한 시도를 꺼리고 있다. 

이제 한국 게임이 세계관을 구축할 때가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과한 자부심도 문제지만, 국산에 자부심을 가질 일이 너무 없어도 문제다. 지금의 게임계처럼.

2019년 출시 예정 인디게임 사망여각
2019년 출시 예정 인디게임 사망여각

전통을 살린 문화 세계관에 선입견을 가지는 경우가 많다. 특히 한국은 근현대사의 아픔 때문에 역사 왜곡이라는 프레임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실제와의 괴리는 고려할 필요가 없다. 각종 문화콘텐츠에서 구축된 전통 세계관은 실제와 다른 경우가 많지만 그 자체로 독자적 매력을 지닌다. 킹덤 역시 실제 조선 역사와 다르게 전란 직후와 세도 정치 시대가 혼합된 가상의 세계를 설계했다.

사실 이 논점은 게임계의 노력뿐 아니라 이 사회가 게임을 바라보는 시선이 함께 달라져야 해결된다. 다른 콘텐츠에서 표현의 자유로 인정되는 내용이 게임에 똑같이 적용되면 문제로 떠오르는 일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인식이 바뀌기 위해서는 먼저 수면 위로 끌어올리는 시도가 필요하다. 지금까지 그런 노력은 보이지 않았다.

일본식 디자인과 판타지를 결합한 세키로: Shadows Die Twice (2019)
일본식 디자인과 판타지를 결합한 세키로: Shadows Die Twice (2019)

가장 원초적인 전제 조건이 있다. 잘 만들어야 한다. 어설픈 품질 속에서 한국 문화만 강조했다가는 말 그대로 '국뽕 의존 게임'이 되고 만다. 이 점 때문에 한국 게임사들에게 매우 어려운 미션이다.

그러나 정말로 게임을 '문화 예술'로 발전시킬 의지가 있다면, 생각하고 시도해야 한다. 다른 지역들의 고유 문화 접목도 몇 번 만에 이뤄진 것이 아니다. 수십 수백 가지 졸작과 평작 사이에서 하나씩 걸작이 나왔고, 세계로 뻗어나간 그 콘텐츠들은 문화 브랜드를 정착시켰다.

몇천억 원 이상 수익을 기록하는 대형 게임사부터 참신한 아이디어를 찾는 스타트업까지, 고유 세계관 구축은 결국 게임계가 한번쯤 풀어나가야 할 과제다. 자본과 개발력은 아직 충분하다. 지금이 지나면 기회는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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