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펑크가 뭘까요?

사실 이 단어를 못 들어본 사람은 없을 거예요. 요즘은 더 많이 들리죠. 많은 사람들이 기대하고 있을 게임인 사이버펑크 2077도 있고요. 하지만 국내에서 사이버펑크 작품을 만날 일이 많지는 않아요.

그래서 사이버펑크를 구체적으로 설명해보자 하면 모호해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막 우주에서 전함 날아다니고, 기동병기가 레이저 쏘고 그런 거?"

"아니, 그건 건담이고"

일단 공상과학(SF)이라는 거대한 상위 장르가 있죠. 얼추 과학이나 미래 이야기 나오면 아무튼 SF로 퉁치잖아요. 하지만 세세하게 파고들면 사실 꽤 여러 장르로 나뉘고, 사이버펑크는 그중 하나 되시겠습니다.

사이버펑크라는 단어는 1980년 브루스 베스키의 단편 소설 제목에서 시작됐고, 윌리엄 깁슨의 장편 '뉴로맨서'가 사이버스페이스 속 해커들의 싸움을 다루면서 장르를 정착시켰죠. 이전까지 과학 기술이라고 하면 '미래 문명의 구세주 vs 핵무기' 정도의 대립이 일상이었는데, 사이버펑크는 '현실적인 사회 문제'로 접근하면서 주목을 받게 됩니다.

미래 전쟁 이야기 나오면 다 비슷한 것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막 몇백 년, 천 년 미래가 배경이면 보통 스타워즈나 건담이나 은하영웅전설처럼 스페이스 오페라로 가고요. 대부분의 사이버펑크는 짧으면 2~30년, 길어야 100년을 넘지 않는 가까운 미래를 다룹니다.

"야, 이거 허황된 이야기 아니야. 당장 내일 벌어질 수도 있어"와 같은 느낌을 줘야 하거든요.

잠깐, 2020 원더키디가 1년 남았네?
잠깐, 2020 원더키디가 1년 남았네?

그래서 애매한 것이, 완전히 망한 세상은 또 해당이 잘 안 돼요. 사이버펑크는 보통 적당히 망해가는 세상이죠. '포스트 아포칼립스'보다 '디스토피아'를 생각하시면 돼요. 소위 '세기말' 감성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사이버펑크가 흥하는 시기는 '기술에 대한 불안'이 커지는 시기와 비슷합니다. 그래서 19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까지 확 떴고, 한동안 잠잠하다가, 다시 미래기술이 사회 문제로 올라오면서 같이 고개를 들었죠. 이제 기술 발전이 인간의 일자리를 빼앗는 문제가 슬슬 체감이 되는 시대인데, 그래서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에서 안드로이드 반대 시위를 하는 실직자들의 장면이 유저 뇌리에 더 박히기도 했고요.

쉽게 말하면 "알파고가 이세돌을 이겼어! 조만간 인공지능이 인간을 지배할 거야! 옴닉 충성충성!" 같은 심리를 반영하는 장르가 바로 사이버펑크.

쀼삡
쀼삡

장르 설명한다고 참 말이 길어졌는데,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단골 소재 : 뇌, 기계, 안드로이드, 광학 병기, 야경, 거대 권력, 갱단, etc...
단골 주제 : 부조리한 사회, 인간의 탐욕, 인권 경시, 개인 생존, 정체성, etc...

이쯤 풀어놓으면 생각나는 작품 몇 가지 있죠? 애니메이션 중에는 공각기동대, 영화는 매트릭스가 "여기 사이버펑크 교과서 있어요" 하는 수준이니 참고하시면 좋고, 그밖에 너무 많아서 다 적으려면 여백이 부족하니 적지 않겠습니다.

게임은 좀 달라요. 유행이 왔다갔다 하는 다른 매체와 다르게 아주 꾸준히 사이버펑크가 등장하죠. 써먹기 좋으니까요. 별의 별 무기 집어넣을 수 있고, 캐릭터도 다양하게 뽑히고, 액션도 현란하게 나오고, 유저에게 동기부여를 줄 만큼 거대한 적을 만들기도 좋고요. 그 과정에서 주제의식도 수준 높게 담은 게임이 참 많습니다.

모두가 잘 아는 오버워치도 요모조모 뜯어보면 사이버펑크 세계관에 해당합니다. 60여년 뒤 미래, 옴닉의 반란, 인공 동면, 각종 신무기의 대립 등 나올 건 다 나오죠. 시대상도 생각보다 어둡고요. 게임 속에 깨발랄한 캐릭터들이 많아서 부정적인 면이 잘 체감되진 않지만.

스타크래프트2도 자유의 날개 캠페인은 사이버펑크에 넣을 만한 배경입니다. 정보와 권력을 독점하는 거대 정부와 짐 레이너가 이끄는 저항세력의 대립. 게다가 동료로 등장하는 타이커스야말로 사이버펑크 작품에서 한 백 번은 나온 것 같은 스탠다드 캐릭터고요.

"불곰이야, 아주 무지막지한 놈들이지"
"불곰이야, 아주 무지막지한 놈들이지"

전형적인 사이버펑크를 잘 만드는 개발자로 워렌 스펙터가 있는데, 이 사람이 만든 데이어스 엑스(Deus Ex)와 시스템쇼크 시리즈는 이후 많은 게임에 영향을 미쳤죠. 사이보그나 해킹 등으로 발생하는 문제나 대립 구도를 흥미로운 스토리텔링으로 버무렸으니 취향에 맞을 것 같다면 플레이해보세요.

밸브의 포탈 시리즈에 등장하는 글라도스가 사이버펑크 설정을 매력적으로 녹여낸 캐릭터고, 미러스 엣지도 전형적인 사이버펑크 세계죠. 서양은 거부감 없이 즐기는 세계관이다 보니 작정하고 고르려면 즐길 만한 게임이 참 많습니다.

지금 최고 기대작이라면 '사이버펑크 2077'이겠죠. 위쳐 시리즈를 만들었던 CDPR이 개발 중이고, 시연 영상만으로 차세대 최고 게임 중 하나가 될 것으로 예상되면서 수많은 유저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대놓고 '사이버펑크'를 제목으로 택했다는 것만 해도 설레는 것은 어쩔 수 없죠. 세계 디자인을 허투루 할 개발사가 절대 아니니까요.

"비트코인 떡상과 떡락 현상도 완전 사이버펑크라니까?"
"그런 소리 할 시간에 진짜 화폐나 더 벌어라"
- 실제 들은 말

한국은 사실, 망하지 않은 작품을 찾는 쪽이 빠르죠. 서양의 국민 영화인 스타워즈도 마니아 콘텐츠일 뿐이니, SF 전체가 처참한데 사이버펑크라고 다를까요. 세기말 사이버 세계나 감성이 화제가 되면서 그와 관련된 영화나 무대가 좀 나오긴 했어요. 하지만 결과는...

앗 아아......
앗 아아......

하지만 그만큼 가능성이 넘치는 시장이 한국입니다.

온갖 과학 기술이 집약된 사회인데 관련 콘텐츠 인기가 없다? 개척할 구석이 많이 남았다는 이야기죠. 미래 기술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고, 그런 것들이 어떤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지에 대한 공감대도 최근 들어 높아졌고요.

인공지능 검색만 해봐도 세상에 검색 결과가 몇 개야
인공지능 검색만 해봐도 세상에 검색 결과가 몇 개야

게다가 문화 소비력이 큰 한국은 SF가 언제든 신소재로 들어올 수 있습니다. 요즘 동남아시아 시장에 경제 투자가 괜히 집중되는 게 아니잖아요. 아직 덜 컸는데 포텐이 크다면 매력적이거든요.

풋볼매니저로 따지면 잠재력 200 만점에 180 정도는 되는 셈이죠. 현재 능력은 낮지만.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 같은 게임이 10년 전쯤 나왔다면 국내 인지도는 적었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지금은 공기가 좀 바뀌었다고 보는 게 맞습니다. 비록 무산됐지만, 사이버펑크 2077이 처음에 한국어 더빙까지 계획했던 것도 이런 가능성을 내다본 게 아닐까요.

지금 국내 여러 사회현상에 사이버펑크와 어울리는 실제 이슈가 정말 많아요. 비트코인 투기에 특히 열광한 나라 중 하나이기도 하고, 외국인들이 상상도 못한 부분에서 첨단 기술이 종종 활용되죠. 평창 올림픽 개막식은 그 특성의 집약체였고요. 기술 자랑 대잔치였죠.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놀라울 만큼 아날로그 상태로 유지되는 부분이 섞여 있다는 점, 그게 사이버펑크의 고유 매력이거든요.

국산 게임으로 넘어가볼까요. 사이버펑크, 없습니다. SF 전체로 따져도 별로 없죠.

한국 게임계의 고질적 문제라서 안타까운 점도 있습니다. 의외로 인식에 비해 게임 장르는 다양하게 나오는 편이거든요. 매출 잘 나오는 장르가 똑같아서 문제지. 그런데 세계관은 정말 획일화됐어요. 예전보다 더욱. 서양 판타지 아니면 동양 무협으로 공식이 정해진 느낌이 강합니다.

플랫폼과 타겟층 모두 '돈 되는' 방향이 정해졌다 보니 어쩔 수 없는 부분인데요. 그래도 조금 더 다양한 시도가 이루어지고 또 사랑받았으면 좋겠다 하는 아쉬움이 항상 남네요.

차라리 예전 국산게임 배경은 꽤 다양한 편이었습니다. 사실 플레이하지 않은 분들은 못 믿겠지만, 악튜러스가 은근히 사이버펑크 요소가 많습니다. 이건 정말인데, 스포일러 없이 어떻게 표현할 방법이 없네. 먼옛날 국산 게임의 단군 할아버지쯤 되는 그날이오면 시리즈도 근미래 배경 공중전을 다룬 슈팅게임이었죠.

완전히 망해버린 포스트 아포칼립스 세계관은 꽤 있는데 말이죠. 최근 화제가 된 라스트 오리진도 이 계통이고요. 물론 이 경우는 소녀전선의 영향도 크지만. '망할랑 말랑' 하는 디스토피아 세계관을 그려야 하는 사이버펑크의 난이도가 더 높긴 합니다. 그만큼, 제대로 그리면 재미있죠.

소녀전선에서 인간 사회가 좀 덜 망해 있으면 그게 사이버펑크
소녀전선에서 인간 사회가 좀 덜 망해 있으면 그게 사이버펑크

어쨌거나 사이버펑크 배경이라고 할 만한 게임은 예나 지금이나 국산에서 찾기 힘들어요. 찾다 보면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현역 게임으로 따지면 클로저스가 냄새를 많이 풍기는 정도. 사이버펑크에 이세계와 이능력 요소를 반씩 넣고 비빈 스타일. 게임 자체는 취향이 갈릴지 몰라도 세계관 표현은 꽤 준수하다고 느꼈습니다.

클로저스의 류금태 PD가 새로 개발하는 카운터사이드 역시 지금까지는 비슷한 스타일로 추측되고 있어요. 가장현실 세계와 이면 세계가 교차한다는 설정인데, 구체적인 정보는 더 기다려야 할 것 같습니다. 이것도 넥슨 서비스 예정이네요. 넥슨이 이런 쪽을 좋아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 PD님 정말 교복 좋아하시는 것 같아
그런데 PD님 정말 교복 좋아하시는 것 같아

다음달 출시한다는 2079 게이트식스가 정통 사이버펑크를 그린다는 점에서 좀 눈에 띄는데요. 서비스는 플레로게임즈. 아니, 꽃 가꾸고 요리 만드는 에브리타운 운영하다가 갑자기 분위기 사이버펑크라니, 갭이 너무 심한 것 아니오. 막 파스타 면발 장전해서 레이저건 쏠 것 같고 막.

가상세계 게이트식스에서 주인공이 거대기업의 인체실험 대상이 되고 레지스탕스의 전쟁에 휩쓸린다는 스토리인데, 일단 세계관 설명만 보면 사이버펑크 그 자체거든요. 게임 내실도 잘 뽑혀나왔으면 좋겠네요.

와 주인공 헤어스타일도 너무 사이버펑크야
와 주인공 헤어스타일도 너무 사이버펑크야

사이버펑크 2077을 기다리다가 생각나서 쓴 이야기가 결국 이렇게 흘러왔네요.

사실 장르가 뭐가 중요하고 사이버펑크가 뭐가 필요하겠어요. 게임만 재미있으면 됐지. 하지만 그래도 이런 것들을 바라게 되는 이유는 그 재미가 단조로워지는 모습이 아쉬워서입니다. 색다른 배경에서 즐기며 느끼는 새로운 재미, 국산게임에서 만날 일이 별로 없었거든요.

주류와 벗어난 시도가 심심찮게 나온다는 것은 환영할 일입니다. 하지만 아직 많이 부족하죠. 그만큼 자주 조명해줘야 하고요. 국내에서도 좀 신선한 이야기를 많이 보고 싶다는 욕구, 그중 하나의 열쇠가 사이버펑크가 될 수도 있다는 대안. 그런 주제를 꺼내고 싶었습니다.

색다르면서도 깊은 재미를 기다려봅니다.

게임은 좀 그랬지만, 서울 배경 외산 사이버펑크 에이전트 오브 메이헴
게임은 좀 그랬지만, 서울 배경 외산 사이버펑크 에이전트 오브 메이헴
저작권자 © 게임인사이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