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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 걱정, 희망... '페리아연대기'와 우리의 연대기
길용찬 기자 | 승인 2019.05.02 20:45

"어쩌면, 혁신이 될 것 같아요." 

열정으로 가득 차 있던 3개월차 신입 기자가 말했습니다. 2012년 이야기이며, 제 이야기입니다. 

처음 취재를 떠난 지스타는 활기찼습니다. PC온라인 신작이 대형 부스를 가득 메웠고, 새 프로젝트 영상이 공개될 때마다 많은 사람이 모여 박수를 보냈죠. 넥슨 한 곳에서만 발표한 PC 플랫폼 신작이 6개였어요. 닌텐도 등 해외 콘솔기업도 부스를 냈고요. 물론 이때도 "너무 비슷한 게임이 많다", "볼 게임이 없다" 등의 말은 흘러나왔습니다. 지금 되돌아보면 쓴웃음을 짓게 되지만요. 

그 자리에서 기자 인생 첫 기대작을 만났습니다. 깔끔한 카툰렌더링 그래픽, 유저들이 직접 지형과 마을과 오브젝트까지 만드는 시스템, 경제와 정치까지 직접 상호작용하는 엄청난 자유도. 저뿐이 아니었죠. 많은 유저들이 환호를 보냈습니다. 차세대 "판타지 라이프"의 시작이라고. 

오랜 시간이 흘렀습니다. 제 첫 기대작은 지금도 기대작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같은 시기 공개한 게임들의 흥망마저 추억 이야기가 된 지금, 페리아연대기는 이제 첫 테스트를 시작합니다. 

프로젝트NT 2012년 공개 원화

이야기는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갑니다. 2011년, 띵소프트가 개발 중인 '프로젝트NT'가 처음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넥슨을 떠났다 다시 돌아온 정상원 대표가 비밀리에 준비하던 신작의 정체였죠. 게임 비주얼과 기본적 시스템 설명이 이미 자리잡은 채였습니다. 

지금으로부터 8년 전, 기나긴 기다림의 연대기가 시작된 순간입니다. 

지스타 2012, 넥슨 퍼블리싱이 결정된 프로젝트NT의 짧은 영상이 공개됐습니다. 세계관과 키라나 수집 육성 시스템 등 정보가 하나씩 풀려나오고, 넥슨 부스의 주목도가 한몫 거들면서 보다 많은 유저들이 이 프로젝트의 존재를 알게 됐죠. 

모두의 기대치가 가장 치솟은 시기는 지스타 2013. 프로젝트NT는 '페리아연대기'로 정식 명칭을 확정하고 자세한 시스템 소개 영상을 발표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띵소프트는 보여줬어요. 정말로 무엇이든 만들 수 있다는 것을. 그 자유도가 절정에 달한 장면은 게임 속 미니게임으로 직접 제작한 테트리스 플레이 화면이었습니다. 넥슨은 띵소프트를 정식 합병하고 정상원 대표는 이후 넥슨 부사장에 취임했습니다. 

모든 조건은 기대를 불러일으켰습니다. 

정상원 대표의 전작 택티컬 커맨더스는 비운의 수작으로 불렸습니다. 독특하고 정교한 시스템과 게임성은 분명 빛나고 있었어요. 이미 보여준 것이 있는 사람이기에 프로젝트NT의 참신함을 믿을 수 있었습니다. 

택티컬 커맨더스 역시 유저간의 자유도 높은 상호작용이 독특했어요. 한 국가에 소속된 유저들끼리 투표로 지도자를 선출하고 국가간에 서로 외교와 전쟁을 벌이는, 2001년 게임의 발상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시대를 앞서간 게임이었죠. 페리아연대기는 그와 같은 시스템을 더 선진화해 내놓는다는 느낌이 강했습니다.

페리아연대기는 어느 곳에서도 레퍼런스를 가져오지 않았습니다. 독립된 발상이었고, 독창적 표현이었죠. 거기에 마비노기2가 예상과 다른 모습으로 드러나면서, 자유도 넘치는 카툰랜더링 RPG를 원하는 마음은 모두 프로젝트NT에 집중됐습니다. 

지스타에서 발표한 모든 내용이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특유의 분위기와 기본 시스템만 지켜진다면 묵직한 발자취를 남길 거라는 반응과 함께 화제의 주인공으로 떠올랐습니다. 

그렇게 시간은 흘렀습니다.

지스타 2016 시연 당시 페리아연대기

 "(지스타 2016) 시연 버전을 해본 사람들이 '만들다 말았냐'고 물었다" 
- 정상원 부사장 인터뷰 中 

무한정 기다리게 되는 날이 이어졌습니다. 페리아연대기의 당초 목표는 2013년 내 첫 CBT. 그 CBT는 2014년으로 미뤄지고, 지스타 2014에서 스페셜 영상 하나만 공개된 것이 전부입니다. 2015년 공개된 정보량은 '제로'. 지스타 불참 이유는 개발 전념을 위해서였죠. 

지스타 2016, 처음으로 관람객 대상 시연 버전을 출품하면서 화제가 쏠렸습니다. 이 시연 버전은 기대치가 급락하는 계기가 됐죠. 프레임 드랍은 눈에 띄게 심했고 전투는 지나치게 느리면서 적응이 힘들어 플레이 자체가 어려운 수준이라는 악평이 줄을 이었습니다. 

다시 오랜 침묵이 시작됐습니다. 많은 것을 갈아엎고 다시 개발한다는 소문만 들려왔습니다. 2017년 말 새로운 소식으로 찾아오겠다 밝혔지만 다시 조용해졌다고 해서 놀라는 사람은 이제 없었습니다. 

대부분 체념한 지 오래인 2019년 4월 15일, 페리아연대기 홈페이지와 SNS에 이미지 한 장이 갱신됩니다. 

'Coming Soon' 

오랜 산고를 겪은 페리아연대기가 드디어 첫 테스트를 진행합니다. 파이어니어 팟은 5월 2일 모집을 마감하고, 8일 선발 발표를 거친 뒤 9일부터 나흘 동안 이어집니다. 8년 만에 내 방 PC에서 게임을 만나볼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2019년 현재. 

모든 조건은 최악입니다. 

8년 동안 세상은 바뀌었습니다. 국내 PC온라인 흥행작은 이제 1년에 하나 나오면 다행입니다. MMORPG는 모바일로 자리를 옮겼고, 그마저 과포화입니다. 국산 신작을 바라보는 시선도 훨씬 차가워졌습니다. 

물론, 지금도 게임계 매출은 늘고 있습니다. 그 매출의 기준이 새로움이 아닐 뿐. 

시간이 흐르고, 가장 박수를 받은 지점은 불안 요소로 풍화됐습니다. 페리아연대기가 처음 드러낸 놀라운 세계와 시스템은 2019년을 사는 우리에게 더 이상 특별하지 않습니다. 해외에서 샌드박스 게임과 자유도 높은 게임은 눈부시게 발전했고, 국내 아동들마저도 아무런 장벽 없이 그것을 즐깁니다. 놀라운 품질의 카툰 그래픽도 어렵잖게 만날 수 있습니다.

"너무 오래 개발한 게임은 잘 나오기 어렵다"는 속설도 이전보다 널리 퍼지고 굳어졌습니다. 실망이 주는 아픔을 너무 많이 겪은 유저들은 실망하지 않기 위해 기대하지 않는 법을 배웠습니다. 

페리아연대기를 기다린 시간은, 한국 게임계가 변해온 모습과 겹쳐져 있습니다. 유저들은 지쳐가고, 게임계도 조금씩 앓아져갑니다. 

그런데 자꾸, 페리아연대기에 희망을 걸어보게 됩니다. 

페리아연대기가 무슨 게임이냐는 물음에, 가볍게 잘라 말하기엔 축적된 시간이 너무 긴 것은 사실입니다. 다만 다른 방향으로 확실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게임'을 줄곧 원해온 사람들의 욕구는 아직 식지 않았다는 사실을요. 

유저들은 기다려다 지쳤습니다. 대부분 체념하고 있었을 거예요. 하지만 지칠지언정 잊어버리진 않았습니다. 파이오니어 팟 모집이 발표되자마자 바로 화제가 달아올랐죠. 그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힘 자체는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페리아연대기는 오랜 시간 개발이 뒤집히고 흔들렸지만, 하나는 버리지 않았습니다. 본래 취지를 벗어난 적은 없습니다. 항상 자체개발 엔진으로 혼자만의 시스템을 꾸렸습니다. 그에 더해 그 고집 때문에 이 '고생'이 길어진 것이기도 하겠죠. 

독특하면서 재미있게 만드는 일은 어렵습니다. 대신, 해낸다면 모든 것은 반전됩니다. 희망을 가지고 테스트를 기다리는 이유입니다. 

제 이야기로 시작했으니, 제 바람으로 끝내겠습니다. 모난 것 없이 무난한 게임만큼은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 장점과 단점이 한 자리에 가득하길 바랍니다. 

오직 페리아연대기만 가진 빛나는 한 가지를 완성해주길 바랍니다. 그렇다면 감히 성공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기준이 너무 낮은 것일까요. 하지만 그만큼, 새로운 아이디어가 빛나는 국산 대작 온라인게임을 본 지 너무 오래 되었거든요. 

긴 시간이었습니다. 초등학생이 성인이 되고, 대학생 새내기가 사회인이 되는 시간. 신혼부부가 아이를 초등학교에 보냈을지도 모르는 시간. 이 이야기를 읽는 당신이라는 게이머의 8년은 어땠을까요. 그보다 더 오래 되었을, 페리아연대기를 만들어온 이들의 시간은 우리 연대기에 어떤 엔딩으로 기록될까요. 이제 정말로 기다림이 끝나가는 것 같습니다. 

2020년이 9년째가 아닌 새로운 1년이길, 너무나 길었던 어제와 조금은 달라진 내일을 열 수 있길 빕니다. 게임계의 시계가 다시 전진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페리아연대기가 그 태엽이 된다면 말입니다.

길용찬 기자  padak@gameinsigh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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