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업계 사업부에 '패스'란 이름의 돌풍이 불고 있다. 국내에서 시기상조란 우려도 잠시, 배틀패스 모델은 게임 서비스에서 놀라운 속도로 자리잡았다.

게임에 따라 게임패스나 시즌패스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지만, '패스'의 개념은 동일하다. 인게임 진행도를 올리면 단계별 보상이 지급된다. 여기서 일정 금액을 지불할 경우 더 좋은 보상을 추가 제공하는 방식이다.

패스는 곧 구독형 모델과 연결된다. 구글스토어의 플레이패스, 애플의 애플아케이드는 일정 구독료를 지불하면 유저가 유료 게임 중 자유롭게 골라 즐길 수 있다. 콘솔 시장에서도 Xbox가 게임패스 멤버십 유저에게 매번 게임을 무료로 증정하는 방식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개별 게임의 과금모델로 눈에 띈 초창기 배틀패스는 2013년 도타2의 기록서 아이템이었다. 판매 수익이 인터내셔널 상금으로 누적되는 크라우드 펀딩 성격을 함께 가졌다. 이는 다음해 대회상금 천만 달러를 넘기는 성과로 이어지는 동시에, 새로운 모델에 글로벌 개발사들이 주목하는 결과로 나타났다.

이후 배틀패스는 스팀 플랫폼의 멀티플레이 위주 게임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다. 항상 매출과 유저 만족 사이에서 고민하는 부분유료화 게임사에게 최고의 선택지였다. 유료 멀티플레이 게임 역시, 긴 시간 추가 수익 없이 운영비를 소모해야 하는 사정상 배틀패스 카드를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서구권에서 인기 많은 게임들이 도전에 나섰고, 결과는 대부분 성공이었다. 가장 많은 유저에게 모델이 알려진 계기는 포트나이트의 배틀패스였다. '배틀패스'가 하나의 대명사로 자리잡은 이유다. 최대 일매출 5천만 달러라는 기록이 배틀패스로 인해 나올 수 있었다.

그밖에 로켓리그의 로켓패스, 데드바이데이라이트의 기록보관소 등이 패스 시스템으로 안정적인 수익을 확보한 예시다. 특히 도타2의 성공사례를 만든 밸브는 카운터스트라이크 GO에 작전팩을 신설했고, 신작 언더로드에서 전투 패스를 주요 과금모델로 삼았다. 리그오브레전드도 격동하는 원소패스 추가로 흐름에 합류했다.

배틀패스는 밸런스에 영향 없는 치장용 아이템과 부가효과 등을 주요 판매전략으로 내세운 점에서 시선을 잡아끌었다. 도타2의 기록서도 올스타 선수 투표권과 스킨 등의 상품을 누적 지급했고, 다른 게임들도 커스터마이징 위주 상품을 새로 내놓으면서 유저에게 즐거움을 주는 방향으로 자리잡았다.

e스포츠와의 연계도 효과를 거뒀다. 로켓리그는 아직도 북미와 유럽에서 활발한 대회 흥행을 유지하는데, 응원팀의 로고를 자기 RC카의 데칼과 프로필에 장식할 수 있다는 점은 유저들에게 매력적이었다. 

배틀패스 열풍이 이어진 곳은 서구권 모바일게임이다. 대표적인 곳은 슈퍼셀이다. 클래시오브클랜의 시즌 도전, 클래시로얄의 로얄패스가 큰 실적을 이끌어냈다. 그밖에 유료 미니게임으로 큰 호응을 얻은 궁수의전설도 가성비 좋은 배틀패스 상품으로 수익을 얻었다.

한국게임에도 조금씩 배틀패스 상품이 스며들고 있다. 패스의 매력을 먼저 감지한 것은 넥슨이었다. 프리투플레이 게임들에 새로운 모델로 패스를 집어넣었고, 처음에 생소하다는 유저 반응도 있었지만 빠르게 정착시키는 데에 성공했다. 

서든어택의 서든패스, 크레이지 아케이드 BnB M의 버블패스 등 많은 게임이 반등의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넥슨은 현재 PC와 콘솔로 개발 중인 카트라이더 드리프트에도 배틀패스를 넣을 예정이다. 오직 치장 아이템만 과금모델로 삼아 페이투윈에 대한 우려를 완전히 불식시키겠다는 것이다.

넷마블도 작년을 기점으로 패스 모델을 적극 도입하기 시작했다. 일곱개의대죄: GRAND CORSS는 수집형 RPG에 호크패스를 추가해 매력적인 상품을 만들었다. 올해 1월 출시한 매직: 마나스트라이크 역시 매직패스 하나만으로도 추가 과금이 필요 없을 정도의 효율을 자랑한다.

그밖에 중견 게임사들도 빠른 속도로 배틀패스에 눈을 돌린다. 12일 출시 예정인 웹젠의 뮤 이그니션2는 웹게임 중 이례적으로 배틀패스 과금모델을 적용할 예정이며, 데브시스터즈의 쿠키런 오븐브레이크도 최근 오븐패스 보상을 추가했다. 특히 개발 중 신작 대부분이 배틀패스 추가 여부를 고민할 정도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배틀패스가 각광받는 이유는 유저에게 부담이 적은 요소들이 모두 들어갔기 때문이다. 확률이 아닌 확정 소득. 노력에 비례한 보상. 강요하지 않는 과금이다.

유저 입장에서 과금의 선택지가 유연하다는 것도 장점이다. 배틀패스 대부분은 임무 단계를 미리 완수한 다음 나중에 구매할 경우 보상이 소급 적용된다. 즉 패스의 10단계까지 클리어한 다음 유료 구매를 선택해도 1단계부터 10단계까지의 유료 보상을 모두 얻는다는 것. 덕택에 당장 부담을 느낄 필요 없이 인게임에 집중할 수 있게 된다.

게임사는 새로운 게임성을 내놓을 기반이 형성됐다는 것이 호재다. 그동안 국내 시장에서 MMORPG 방식이나 확률형 아이템에 기대는 게임이 아니면 사업 계획을 수립하는 데에 제약이 있었다. 소규모 및 인디게임들도 고질적 우려인 상품성 문제를 해결할 선택지가 생겼다.

물론 개발 방침의 변화가 이루어지는 것은 시간이 더 필요할 전망이다. 배틀패스 모델을 도입한 한 게임사의 관계자는 "아직 모바일 MMORPG의 막대한 기대수익을 다른 장르가 따라잡기는 쉽지 않고, 강화나 뽑기 등 기존 모델은 당분간 주류로 남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다만 그밖의 장르는 배틀패스가 필수 대안으로 자리잡을 만하다"고 희망 섞인 관측도 함께 내놓았다.

배틀패스도 만능은 아니다. 유료 지급상품에 포함되는 아이템 성격에 따라, 혹은 패스 구매 가격에 따라 친화적이지 않은 모델이 탄생할 가능성은 충분하다. 단순히 확률형 아이템 모델에 덮어씌우는 방식을 사용할 경우, 추가 과금요소만 더 늘어나는 결과를 초래할 위험도 있다.

하지만 확률형 아이템을 향한 오랜 스트레스가 줄어들고, 게임사와 유저가 상생할 수 있는 모델을 찾았다는 점만으로 게임패스의 가치는 빛난다. 유저들은 금액을 지불해도 정당한 대가를 얻지 못하는 상품에 오랜 기간 지쳐 있다. 

배틀패스로 대표되는 구독형 모델은 더 발전할 여지가 있다. 그 진화는 게임사의 합리적 수익과 유저 만족도에 영향을 끼칠 것이고, 나아가 게임문화 개선도 한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그 과정에서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유저와 게임사간 타협점을 지킨 채 나아가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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