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하게 만든 작품들이 있습니다. 불쾌감이나 죄책감으로 표현되기도 합니다. '사이다'가 막 터지는 유쾌상쾌한 이야기도 좋지만, 마음 한 구석에 찝찝하게 쓴맛을 남기는 이야기도 존재합니다.

불편하다고 해서 무조건 졸작은 아닙니다. 어떤 의도로 그렇게 만들었는지, 그 의도가 온전히 전달되는지에 따라 평가는 나뉩니다.

게임도 마찬가지입니다. 라스트오브어스 파트2(라오어2) 논란에서, 유저에게 심리적 불편과 괴로움을 선사한다는 것은 모두가 동의했죠. 중요한 것은 그 불편의 설득력입니다.

논쟁 과정에서 떠오른 주제 중 하나가 라오어2의 선형적 스토리입니다. 밀도 있는 하나의 이야기를 따라가기에 효과적인 방식입니다. 영화나 드라마 등 대부분의 종합예술은 선형적 스토리거든요. 몇몇 인터랙티브 무비를 제외하면 말이죠.

하지만 게임은 '조작'을 통해 완성됩니다. 결정적인 차이점이자, 게임을 정의하는 개념이기도 하죠. 하다못해 스토리 감상에 가까운 텍스트 어드벤처(비주얼노벨)조차도 최소한의 조작 요소와 선택지가 존재하기 마련입니다.

라오어2 스토리에서 불만이 폭발한 이유는 단순히 불편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미 유저들은 심리적으로 불편하게 하는 게임을 여럿 만나봤고, 그중 상당수를 걸작으로 인정한 과거가 있거든요. 오히려, 불편을 주는 방식이 진부하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디스 워 오브 마인 - 생존이 정의롭지 못한 세계에서

전쟁으로 황폐화된 무법 도시, 당신이 굶주린 배를 부여잡고 침입한 곳은 노부부가 사는 집입니다. 무릎을 꿇고 비는 그들을 무시하고 약탈한다면 당분간 생존할 수 있겠지만, 대신 그 노부부가 굶어 죽을 겁니다. 당신의 선택은 무엇입니까?

NPC들은 각자의 사연이 있고, 유저의 선택에 반응해 생존을 위한 몸부림을 보여줍니다. 극단적 환경에서 모두가 살아남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잔혹한 행동을 반복한다면 유저 캐릭터들의 멘탈이 손상되고, 그 고뇌는 플레이 제약으로 나타납니다. 생존게임의 문법을 차용한 이 게임은 생존, 생명, 도덕률을 향해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죠.

11비트 스튜디오의 후속작 프로스트펑크 역시 사회적 딜레마를 제시합니다. 빙하기 속에서 살아남는 생존 도시경영 게임으로, 유저는 때때로 특정 계층을 희생시키며 인권을 무시하는 선택 사이에서 고민하게 됩니다.

위쳐3, 피의 남작 퀘스트 - 과거는 바꿀 수 없고, 미래는 짐작할 수 없다.

인간 중 절대악은 몇 없습니다. 절대선은 더욱 없죠. 우리 대부분은 중간 어딘가에서 실수하고, 후회하며, 조금이나마 나은 미래를 고민합니다.

위쳐3: 와일드헌트 초반부 등장하는 피의 남작 퀘스트는 그런 인간들이 얽히면서 발생한 드라마를 춸저히 잔혹하게 풀어내 극찬을 받았습니다. 어떤 선택을 하든 결말은 비극입니다. 하지만 선택을 하게 되는 과정, 선택으로 인한 전개는 모두 합리적이죠.

'원하는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사람이 죽어야 한다'. 수많은 이야기에서 써먹어온 딜레마입니다. 멀리 갈 것 없이 라스트오브어스가 그랬죠. 생명을 선택할 권리는 누구도 없습니다. 다만 조금 더 옳은 길이 무엇인지 생각하는 과정에서 메시지는 등장합니다. 마이클 샌델의 저서 '정의란 무엇인가'에 등장하는 전차의 딜레마 역시 비슷한 울림을 전달합니다.

"대부분의 경우, 선택을 했으면 절대 뒤돌아봐서는 안 된다". 주인공 게롤트는 특정 결말에서 이런 대사를 남깁니다. 다른 선택을 했더라도, 그 결과가 옳았다고 확신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스펙옵스: 더 라인 - 선을 넘어버린 인물의 내면

그렇다면, 선택지가 없는 선형적 스토리에서 불편을 제공하는 시도는 무리일까요? 2012년 스펙옵스: 더 라인은 비록 호불호가 갈릴지언정 성공적인 불편함을 창출한 사례입니다.

고립된 도시 두바이에서, 주인공 마틴 워커 대위는 자신의 대원들과 함께 다른 부대의 악행을 저지하는 과정에서 금지된 대량 살상무기 백린탄을 발사하고 맙니다. 일련의 게임 플레이 과정은 이후 펼쳐질 전개에서 커다란 결말로 치닫게 됩니다.

유저의 행동이 강제되는 선형적 플레이와 메시지가 들어맞지 않는다는 비판도 존재했는데요. 한 인물의 행보와 내적 갈등을 따라간다는 관점으로 볼 경우 이해가 되는 측면이 있습니다. 특히 PTSD(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묘사가 게임 플레이 과정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이 장점입니다. 체험을 제공한다는 게임의 가치를 충실히 반영한 것은 아닐까요.

셸터(Shelter) - 먹히지 않기 위해서는, 먹여야 한다

인지도가 높지 않은 인디게임이지만, 라오어2가 하려고 한 이야기는 이미 2013년에 이 게임이 마무리했을지도 모릅니다. 심플한 그래픽과 짧은 플레이타임으로 먹이사슬과 모성애의 순환을 보여준 수작입니다.

유저는 잡식성인 어미 오소리입니다. 다섯 명의 새끼들을 이끌고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 떠나야 하는 선형적 진행입니다. 먹이를 구하지 못하면 아이들이 하나씩 굶어 죽고, 상위 포식자를 만나 도망치지 못해도 물려 죽습니다. 약한 동물을 사냥해 아이들을 먹일 때, 유저는 먹이사슬 중간 지점의 입장을 깨닫게 되죠.

셸터가 보여주는 사슬은 엔딩까지 순환됩니다. 결국 새 보금자리를 찾기 전에, 어미 오소리는 남은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대신 독수리의 시선을 끌고 먹이가 됩니다. 게임 마지막 장면은 독수리가 오소리를 물고 자신의 아이들이 기다리는 둥지로 향하는 모습입니다. 주인공이 죽는 결말이지만, 누구도 이것을 배드 엔딩이라고 표현하진 않을 겁니다.

유저가 불편해지는 딜레마는 인간과 생명 사이, 그리고 가치관 사이의 충돌에서 나옵니다.

그 만남이 현실감 있게 얽히고 울림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그만큼 인간과 가치관을 그려내는 일이 중요합니다. 관점에 따라 다른 그림이 나타나는, 입체적인 작품은 그렇게 나타납니다.

선형적이냐 아니냐는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선형적 게임도 유저에게 얼마든지 죄책감을 줄 수 있고, 불쾌한 감정을 일으키는 일도 가능합니다. 단, 좋은 작품이 되기 위해서는 그 불쾌와 죄악을 설득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앞으로 더 좋은 게임이 우리를 불편하게 해주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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