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게임 유저 중 '피로도' 개념을 좋아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인식의 변화가 찾아올 수도 있는 사례가 라그나로크(이하 라그) 오리진에 생겼다.

피로도는 플레이 제한 시스템이다. 플레이 시간이나 측정 행위 반복에 상한선을 걸어놓고, 그 이상 이용할 경우 보상에 패널티를 준다. 플레이 자체를 막는 경우도 많다. 수집형 RPG에서 흔히 사용하는 스테미너 개념 역시 피로도의 일종이다.

게임사들이 피로도를 적극 도입한 이유는 다양하다. 그중 첫째는 콘텐츠 소모를 늦추는 것. 콘텐츠 개발 속도가 하루종일 플레이하는 유저의 속도를 따라가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게임에 따라 피로도 상승을 막거나 줄이는 아이템을 판매해 수익성 시스템으로 변질되는 경우도 있었다.

라그 오리진은 하루 2시간의 피로도가 걸려 있다. 모바일 MMORPG 대부분이 24시간 자동사냥을 허용하는 것에 비해 독특한 체제다. 사냥 가능 시간이 고작 2시간이라니, 얼핏 시대를 역행하는 모습으로 비춰진다.

그런데 반응은 정반대로 나타났다. 게임의 다른 부분에 이슈가 발생하고 불만을 보일지언정, 피로도 시스템에 대해서는 시간이 갈수록 유저들 사이에서 호평이 주를 이룬다.

피로도는 순수하게 전투가 켜졌을 때만 소모된다. 탈진 상태가 됐을 때 패널티는 필드 몬스터에게 경험치와 아이템을 얻지 못하는 것. 퀘스트나 던전 보상은 지장이 없다. 라그 오리진은 퀘스트에서 얻는 경험치 비중이 매우 높다. 즉, 피로도는 자동사냥의 한계치를 정하고 있다.

할 게 없다는 말은 나오지 않는다
할 게 없다는 말은 나오지 않는다

피로도가 긍정적으로 작용하는 가장 큰 이유가 여기서 나온다. 콘텐츠가 양과 질에서 부족했다면 피로도는 불만의 대상이 됐겠지만, 라그 오리진은 자동사냥 외에 진행할 수 있는 콘텐츠가 굉장히 많다.

메인 및 서브퀘스트를 포함해 의뢰, 헬헤임의 악몽, 이그드라실 수호전, 하루 한정 콘텐츠, 길드 콘텐츠, 이벤트, PvP 등. 이 모든 것들을 전부 클리어하려면 피로도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7~8시간 이상을 너끈히 진행할 수도 있다. 여기에 도감작은 피로도와 관계 없이 가능하다.

피로도가 소진된 뒤 하루 60분씩 누적 제공되는 프레이의 축복도 중요하다. 경험치를 얻지 못하는 것은 그대로지만, 아이템 파밍은 가능한 시간이다. 라그 오리진 유저의 실제 하루 플레이 시간은, 최소 3시간에서 최대 7~8시간 가량이다. 절대 적은 시간이 아니다.

피로도를 과금모델로 삼지도 않았다. 월정액인 카프라 회원권은 피로도 제한을 늘리는 것이 아니라, 휴식 경험치 보너스를 올려주는 선에서 혜택이 제공된다.

많긴 많다
많긴 많다

플레이 시간을 강요받는 부담은 확실히 줄어들었다. 모바일 MMORPG에서 유저들은 성장이 뒤쳐지지 않기 위해 24시간 자동사냥을 필수로 받아들여왔다. 잠들기 전 돌려놓을 사냥터를 찾는 것도 일상이다. 사냥 제한이 없다는 것은 곧 요구치도 올라간다는 것을 의미했다. 23시간을 돌려도 1시간이 상대적으로 손실이기 때문이다.

사냥터 문제 해결 효과를 말하는 유저도 있었다. 라그나로크 IP는 전통적으로 원거리 직업이 조금 유리했다. 근거리 직업이 몬스터를 향해 달려가는 동안 화살이나 마법으로 먼저 잡혀버리는 일은 허다했다.

하지만 라그 오리진은 사냥터 순환이 빠르고, 자리 선점 경쟁이 과열되지 않고 있다. 여기에 용병 시스템까지 피로도와 좋은 시너지를 보인다. 원거리 용병과 조합해 근처 몬스터를 정리할 수 있어, 빠른 공격이 어려운 근거리 직업도 자리잡기와 사냥 효율이 떨어지지 않는다.

한 가지 더 추측할 수 있다. 피로도는 콘텐츠 설계의 핵심을 담당한다. 무한 자동사냥이 가능했다면, 지금과 같은 파티 콘텐츠 활성화는 불가능했다.

모바일 MMORPG에서 디자인 오류가 흔하게 벌어지는 지점이다. 실시간 동시 플레이가 부가 콘텐츠로 존재할 경우 참여도가 갈수록 떨어지는 것. 자동사냥이 훨씬 편하기 때문이다. 특히 모바일 환경은 PC에 비해 수동 조작 피로가 높다. 파티를 구하기 어려워질수록 더 많은 유저가 자동사냥에 의존하고, 파티 콘텐츠는 더욱 부실해지는 악순환이 있었다.

"파티 콘텐츠가 라그 오리진의 꽃"이라고 사전에 밝힌 만큼, 파티가 활발하게 운영되는지 여부는 무엇보다 중요했다. 자동사냥의 피로도는 그런 콘텐츠의 밸런스를 유지해냈다. 라그 오리진은 지금 어떤 던전이든 파티를 구하기 매우 쉽다.

피로도의 존재 여부가 게임의 평가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라그 오리진은 그 사실을 알려준다. 피로도를 통해 오히려 게임 플레이를 즐겁게 만들 수 있다는 사실도 보여준다.

피로도에 구애받지 않고 즐길 수 있는 콘텐츠가 많다면, 그리고 그 콘텐츠가 재미를 갖춘다면 가능한 일이다. 과금 모델에서도 자유로워야 한다. 성장 격차 완화, 유저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사용되는 피로도는 게임의 생명력을 늘리는 촉매가 된다.

무한 자동 플레이가 강요되던 모바일게임계에 좋은 사례가 나왔다. 라그 오리진의 게임성과 콘텐츠 설계는 다른 게임들에게 참고 대상이 될 것으로 보인다. 운영을 잘 하는 일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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