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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에 묻힌 진짜 '나'의 이야기, 베리드 스타즈
길용찬 기자 | 승인 2020.08.04 17:10

시나리오는 격렬하다. 주제는 트렌디하고 현실적이다. 라인게임즈의 텍스트 어드벤처 베리드 스타즈는 지금 시대의 화두를 말하고 있다.

베리드 스타즈(Buried Stars)를 직역하면 '묻힌 별들'이란 의미다. 게임 속 오디션 프로그램의 제목이기도 하다. 숨겨진 스타를 발굴하는 오디션 본선 생방송 현장, 갑자기 공연장이 붕괴되면서 TOP5 생존자들은 6시간 동안 어두운 무대에 갇힌다. 그 속에서 벌어지는 사건과 진상은 중의적 의미를 띤다.

6년 만이다. 그리고 첫 콘솔 도전이다. 전작 검은방과 회색도시에서 납치와 탈출, 대립과 복수를 다뤄온 '수일배' 진승호 디렉터가 서바이벌 오디션 속 커뮤니케이션으로 새로운 이야기를 던졌다.

"누구든 진실된 모습을 들키지 않고 두 개의 가면을 쓸 수는 없다"

게임 시작과 함께 등장하는 이 글귀는 소설 '주홍글씨'를 출처로 하지만, 그보다 널리 알려진 계기는 영화 '프라이멀 피어(1996)'다. 또다른 인격에 얽힌 살인 사건에 접근하며 벌어지는 법정 스릴러로, 다중인격 소재 영화의 효시가 됐다.

베리드 스타즈 역시 이야기의 큰 줄기에서 인간이 가진 양면을 다룬다. 원래 소속을 저버리고 홀로 오디션에 나서 '배신자'와 '탈주자'의 오명을 얻은 한도윤과 민주영, 프로그램에서 강제로 부여한 안하무인 캐릭터를 연기하며 괴리감을 느끼는 오인하 등. 무너진 무대에 갇힌 인물들은 타인이 바라보는 나와 내면의 나 사이에서 갈등하고 고뇌하는 모습을 보인다.

베리드 스타즈는 인물의 내면과 그 사이 관계성을 커뮤니케이션 방식으로 풀어낸다. 인간과 관계를 쌓아나가는 과정에서 숨겨진 비밀을 알게 된다. 그렇게 얻은 키워드는 또 다른 인물의 화제를 끌어내는 촉매로 활용된다. 대화를 반복하는 사이 각 인물의 진실에 접근하고, 최종적으로 사건의 최종 진상에 다다를 수 있다.

이야기는 훌륭하다. 서서히 죄여오는 압박감, 예상하지 못한 이야기 전환, 말끔한 복선 회수가 기승전결이 맞물리면서 밀도 있는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자신과 타인 사이 자아 이야기는 여럿 존재하지만, 텍스트 어드벤처에서 심도 있게 화두를 던지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게임 속 SNS '페이터'는 인물의 양면을 드러내는 신선한 방식이다. 페이터 타임라인 속에서 중요한 키워드를 찾아내는 시스템인 동시에, 주인공 감정 이입에 도움을 준다. 페이터 속 계정들의 태도와 말투는 소름 돋을 정도로 현실적이다. 유저가 한도윤의 입장이 되어 직접 멘탈이 깨져보는 경험을 할 수 있다.

페이터 시스템에 높은 점수를 주는 이유는 또 있다. 계정들의 캐릭터까지 확실하다는 점이다. 누군가는 팬으로서 격려의 말을 남기기도 하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가장 질 낮은 악플을 일관된 말투로 쏟아낸다. 그 중간에서 대세에 휘둘리며 상처를 제공하는 계정도 있다. 이 모든 캐릭터가 어우러져 형성되는 SNS 생태계를 완벽하게 표현한다. 유쾌하지 않은 경험이지만, 페이터를 둘러싼 연출은 깊은 울림을 지닌다.

하이퍼 리얼리즘의 현장

게임에서 '가능성'으로 표현하는 각종 분기 역시 흥미롭다. 모든 주요 등장인물은 죽을 수도, 살 수도 있다. 그중 몇몇은 트루 엔딩을 본 뒤에 풀리고 사건의 진상에서 미처 풀지 못한 궁금증도 대부분 해소된다. 완전히 다른 스토리를 풀어내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다회차 콘텐츠를 즐길 가치는 충분하다.

전작에서 지적받던 과한 문어체도 많이 완화됐다. '~든가'를 '~던가'로 계속 쓰는 오류가 거슬리는 정도다. 말투 역시 인물별 개성이 뚜렷하고, 검은방 시리즈 전통이었던 개그 엔딩 역시 한결 센스 넘치게 돌아왔다.

연출도 텍스트 어드벤처에서 구현할 만한 최대치를 보여준다. 격정적인 순간을 치고 들어오는 음악과 사운드는 인상적이고, 변주되는 청각과 시각 연출이 감각적이다. 성우들의 열연도 빛난다. 만화풍이 아닌 영화 더빙 스타일의 억양으로, 국내에서 찾기 어려운 소재인 만큼 모든 감정을 실은 연기를 만날 수 있다.

좋은 이야기에 비해, 유저 플레이 경험 설계에서 아쉬움은 남는다.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기 위해서는 다회차가 필수인데, 첫 플레이에서 이미 했던 플레이를 대부분 반복하고 나서야 분기가 발생한다. 지난 회차에서 제시한 키워드의 결과를 미리 보여주는 혜택은 있다. 하지만 이야기가 변주가 너무 늦게 일어난다는 것은 다회차 의지를 갉아먹는 원인이 된다.

게임 플레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커뮤니케이션 파트도 즐거움보다 노동의 대상이 된다. 텍스트가 많은 것은 이 장르에서 문제가 아니다. 그 내용이 다양하지 않기 때문에 단점이 생긴다. 만일 다수 인물이 한번에 참여하는 커뮤니케이션이 존재하거나, 인물간 관계성을 조금 더 강조했다면 괜찮았을지도 모른다.

텍스트 분량 대비 초반 전개 속도도 느리다. 그만큼 밑그림은 단단하지만, 다음 이야기가 굉장히 궁금한데 같은 주제 이야기를 반복하며 돌다리를 모두 두드리는 과정을 좋아할 유저는 몇 없을 것이다. 그밖에 초중반 주변 지역 탐색 때 단조로운 진행에 로딩 반복으로 템포가 끊기는 점, 인물의 양면에 집중하다 보니 캐릭터를 풀어내는 패턴이 모두 비슷해지는 맹점도 존재한다.

2회차에서 개그 엔딩은 한번 보고 넘어가자

텍스트 추리 어드벤처는 확실한 마니아층이 존재하지만, 그만큼 작품 경쟁이 치열하다. 콘솔과 글로벌 도전은 그만큼 까다로운 시도였다. 개발 노하우 없이 콘솔 멀티플랫폼 프로젝트를 시작했고, 그 노력은 매력적인 결과물로 나타났다.

진승호 디렉터는 검은방과 회색도시에 이어 자신의 작품 세계를 선명하게 드러냈다. 그 세계는 2020년 감각에 맞춰 진화했다. 온라인 시대 자신과 타인 사이에서 묻히는 진짜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주제뿐 아니라, 시나리오의 완성도에서 깊은 울림을 전달한다. '한국임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한국이기 때문에'나올 수 있었던 이야기다.

차기작을 만나게 된다면, 게임 플레이의 밀도를 높이는 작업이 함께 이루어지길 바라게 된다. 게임에서 스토리 플레이의 잠재력은 무궁무진하다. 베리드 스타즈는 국내 게임계에서도 묻혀 있던 가능성을 발굴하는 계기가 될지 모른다.

길용찬 기자  padak@gameinsigh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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