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기, 올해를 재미있게 수놓은 게임들을 돌아보게 됩니다. 그중에서도 연말에 반드시 언급하기로 준비해온 게임이 하나 있었어요. 최고의 스토리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13기병방위권은 드래곤즈 크라운과 오딘스피어로 알려진 바닐라웨어가 6년을 갈고 닦아 내놓은 어드벤처 게임입니다. 일본에서 작년 11월, 아시아 지역에 올해 3월 출시됐죠. 바닐라웨어의 카미타니 조지 사장이 2013년부터 직접 시나리오를 맡아 기획하고 다듬은 끝에 탄생한 게임입니다.

큰 화제가 되지 못한 것도 이유는 있습니다. 조금만 플레이하면 세상 모든 클리셰가 다 모인 느낌을 주거든요. SF, 사이버펑크, 메카닉, 루프물, 청춘 순정물까지 흔하디 흔하게 볼 수 있는 '떡밥'이 초반을 메웁니다. 이러면 결말까지 빤히 예상되겠다 싶을 정도로요.

그리고,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는 결과물이 나왔습니다. 뻔한 소재들이 모여 신선하고 완벽한 기승전결이 완성됐습니다. 그동안 게임에서 제대로 발휘된 적 없었던 스토리텔링 기법과 함께 말이죠.

"이 퍼즐을 이렇게 맞춰낸다고?"

플레이 방식은 독특하고 도전적입니다. 보통 스토리 어드벤처는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처럼 시간순 플롯의 비선형적 내러티브를 취합니다. 순서대로 사건을 진행하면서 유저 선택에 따라 분기가 달라지는 것이죠. 하지만 13기병방위권은 정반대입니다. 거대한 스토리 줄기가 정해져 있고, 이야기를 구성하는 직소퍼즐 조각을 하나씩 맞춰나가는 방식입니다.  

그 과정에서 등장하는 주인공은 무려 13명에 달하는 소년소녀들. 유저는 주인공 13명을 계속 바꿔 플레이합니다. 각자의 시점에서 플로우 차트를 따라가고, 서로 합류하거나 엇갈리죠. 인물에 따라서는 비슷한 장면을 조금씩 변주된 채로 반복하기도 합니다. 

설명만 들으면 의문이 들 법합니다. "시점이 저렇게 많으면 정신 하나도 없겠는데?". 맞아요. 시대 배경이 1985년이었다가 갑자기 2104년으로 가질 않나, 같은 인물이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질 않나. 초반만 보면 무슨 이야기인지 알아내기 참 어렵습니다. 

그런데, 그 잠시만 넘기면 절묘하게 섬세하게 맞춰집니다. 유저 입장에서도 혼란이 감탄으로 바뀔 만큼, 왜 시나리오 구성에만 5년 넘게 걸렸는지를 이해할 만큼.

바라보기만 해도 눈이 정화되는 아트워크
바라보기만 해도 눈이 정화되는 아트워크

"유저의 감정을 조종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칭찬할 점이 또 있습니다. 저 13명의 밸런스가 완벽합니다. 누구 비중이 높고, 몇 명은 사실상 조연이고 이런 게 없어요. 누구든 이야기를 풀어내는 핵심 키를 가지고 있고, 누군가와 연계되어야 퍼즐이 하나씩 맞아들어갑니다. 그나마 히지야마 타카토시 비중이 미세하게 낮은데, 그 친구는 다른 의미로 엄청난 존재감을 가져서 문제가 없고요.

예를 들어, 방과후 교실에서 친구 A와 B가 서로 티격태격하다가 다른 친구 C의 집에 게임하러 놀러가는 씬이 있다고 치죠. 전세계에서 수천만명이 겪어봤을, 지극히 일상적인 장면입니다. 그런데 전후 이야기가 조금 더 밝혀진 다음, C의 시점에서 이 장면을 다시 돌려보면 그 속에 소름 돋는 비밀이 숨겨진 경우가 있습니다. 

13기병방위권은 이런 기법을 통해 세계의 진실을 밝혀내고, 유저 뒤통수를 치다가, 극적인 절정에 치달아갑니다. 

"와, 이건 상상도 못했다"고 느끼는 순간이 적어도 다섯 번 이상은 찾아올 겁니다. 초중반 플레이에서 무엇을 상상하든 후반 내용은 다를 겁니다. 반전은 때로 무섭고, 흥미로우면서도 감동적입니다. 유저의 감정을 조종하는 긍정적인 방법이죠.

다양한 오마주도 감초처럼 잘 들어갔습니다. 지각한 여고생이 식빵 물고 달려가다가 의문의 남자와 부딪히는 장면부터 시작해서 E.T나 우주전쟁, 맨인블랙, 마크로스 등 과거 SF를 향한 헌정사가 각지에 숨어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마크로스 오마주가 펼쳐지는 순간은 게임 연출의 백미라고 할 만합니다.

전투는 독립된 것이 아닌, 이야기의 보조 바퀴
전투는 독립된 것이 아닌, 이야기의 보조 바퀴

"전투는 이야기 속 퍼즐의 지향점"

이런 방식은 진입장벽에서 위험성도 있어요. 파편화된 씬이 난립할 경우 초반 전개를 따라가기 어려운 유저가 생길 수 있으니까요. 머릿속에서 플로우 차트가 쉽게 정리되기 위해서는 지향점이 있어야 하죠. 누구나 여기가 이야기의 목표 지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곳.

바로 그 지향점 역할을 전투 파트인 '붕괴편'이 담당해줍니다. 붕괴편은 튜토리얼 시작부터 친절하게 힌트를 뿌립니다. 스토리 모드인 '회상편'보다 뒤에 벌어지는 사건이라는 것을 말이죠. "왜 이 아이들이 기병을 타고 괴수와 싸우게 됐는가"를 비밀의 목표 키워드로 삼고 이야기에 접근하도록 만드는 장치입니다. 직소퍼즐로 따지면 바깥 귀퉁이 그림을 미리 맞춰주는 것과 비슷합니다.

전투 퀄리티가 썩 뛰어나진 않아요. 바둑알 같은 유닛들이 움직이는 모습을 처음 보면 요즘 게임 그래픽이 맞나 싶죠. 그래도 재미 구색은 갖춰졌고, 메카닉과 파일럿을 성장시키는 재미도 쏠쏠합니다. 후반 맵을 뒤덮는 적 규모를 생각해도 모델링에 힘을 줬으면 프레임 감당이 안됐을 거고요. 

처음부터 시간 순으로 감상하면 그야말로 장대한 서사시
처음부터 시간 순으로 감상하면 그야말로 장대한 서사시

게임시나리오 기법의 새로운 바이블

가장 중요한 평가를 빠뜨릴 뻔했네요. 13기병방위권의 스토리는 단순히 질이 높고 뛰어난 것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재미있어요. 이야기가 풀리는 쾌감과 다음 전개를 향한 궁금증에 엔딩까지 멈추기가 어렵습니다. 드라마로 따지면, 한편을 보면 견딜 수 없어서 다음 편을 계속 누르다가 밤을 새는 현상과 비슷합니다.

엔딩 이후 '탐구편'에서 사건 발생 시간순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스토리 씬을 재감상할 수 있는데요. 이것도 놓칠 수 없는 경험입니다. 인물의 행동과 대사를 받아들이는 시선이 완전히 달라지게 돼요. 놓치고 있었던 복선도 눈에 들어옵니다. 어떤 순서로 즐기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경험을 제공한다는 의미입니다. 플롯의 힘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스토리를 뒷받침하는 연출도 훌륭하죠. 바닐라웨어는 2D 아트워크 분야에서 세계적 명성을 가졌는데, 그 역량은 여기서 정점에 달했습니다. 섬세한 배경과 아름다운 광원, 절정을 극대화하는 애니메이션과 음악은 그 자체로 예술적입니다.

스토리 게임을 좋아하면, 게임 시나리오에 관심이 있거나 직접 만들고 싶다면, 13기병방위권은 무조건 즐겨봐야 합니다. 2020년을 돌아보며 반드시 공유해야 하는 게임입니다. 적어도 10년 이상 훌륭한 내러티브의 예시로 쓰일 만한 작품이 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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