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그, 콘솔 최적화, 자유도. 사이버펑크 2077은 모든 분야에서 뜨거웠다. 한없이 치솟은 기대감 중 상당수는 실망으로 되돌아왔다. 모두가 이미 알고 있을 이야기를 제외하고 근본적인 지점을 짚어보려 한다. 게임이 내세운 핵심 요소, RPG에 대해서다.

사이버펑크 세계관은 1980년대 TRPG의 룰북 중 하나에서 출발했다. Table-Talk RPG, 현재 모든 RPG들의 조상이 되는 장르다. 1명의 던전마스터(DM)가 진행 가이드 역할을 하고, 플레이어 여럿이 모여 시트 하나와 대화만으로 게임을 진행한다. 그중 히트작이었던 사이버펑크 2020을 오픈월드 게임으로 옮긴 작품이 사이버펑크 2077이다.

사이버펑크는 유쾌하지 않은 세계관이다. 기술은 고밀도로 발전했지만 윤리는 퇴화한 시대에서 밀리테크와 아라사카 등 거대 기업이 사회를 장악한다. 극심한 양극화, 인간성과 자아의 실종, 몸 속의 칩, 원색으로 번쩍이는 네온사인이 사이버펑크를 상징하는 키워드다. 먼 미래와 1980년대의 스타일이 겹치는 것도 특징이다.

CDPR은 나이트시티의 재해석 속에서 어떤 롤플레잉의 꿈을 그렸을까. 원작 이미지보다 조금 더 화려하다. 그리고 조금은 더 수직적이다.

사이버펑크 2077은 인게임과 컷신의 구분 없이 대부분의 이야기를 한 공간에서 풀어나간다. 개발 과정이 어려울 뿐, 구현이 가능하다면 몰입감을 주기 가장 좋은 장치다.

그래서 1인칭 시점은 적절했다. 이야기를 나누고, 뜻밖의 사건에 휘말리고, 난관을 헤쳐나가는 과정에서 실제 그 자리에 있는 느낌을 준다. 유저는 중요한 메인 퀘스트를 수행하는 동시에 원하는 행동을 취할 수 있다. 대화 도중 다른 의뢰인의 전화를 받거나, 문자에 답장을 보내는 일이 대표적이다.

미션을 수행하는 방식은 크게 3갈래로 나뉜다. 정면 돌격, 잠입과 암살, 능력을 사용한 우회. 미션 대부분은 최소한 2개 이상의 선택지를 제공한다. 우회 방식도 스테이지에 따라 힘, 지능, 테크 능력으로 나뉜다. 메인 퀘스트도 마찬가지다. 대화로 해결하거나, 다짜고짜 총부터 꺼내들거나, 돈으로 매수할 수 있다. 큰 차별점은 아니지만 RPG 기본 구조는 어느 정도 선택지를 부여하는 형태로 흘러간다.

서브 퀘스트는 '평균적으로' 위쳐3보다도 흥미로웠다. 나이트시티 인물들은 능동적으로 V에게 먼저 전화를 걸어오고, 자신의 용건을 말한다. 주디, 팬앰, 리버 등 연애 가능 인물들은 저마다 다른 개성으로 매력이 빛난다. 주변을 둘러싼 에피소드 역시 탄탄하다.

경우에 따라서는 단순한 업무로 시작된 의뢰가 상상하지 못한 전개로 흘러가기도 한다. 시장후보 부인의 전화, 택시 인공지능인 델라메인의 의뢰, 길거리 선동꾼의 이야기, 한 남자의 청부살인 등. 각자의 이야기는 질과 양 모두에서 만족스럽다. 미션에 따라서는 결과가 3갈래로 나뉘는 분기점도 존재한다.

지나가다 만나는 '물음표'도 뜻밖의 재미를 종종 선사한다. 식스 스트리트 갱의 사격 시합에 참가하면서 처음 교감을 나누기도 했고, 정치싸움에 말려든 한 경찰의 생사를 두고 갈등에 빠지기도 했다. 물론 그 이야기들도 유저의 선택으로 다른 방향을 찾아갈 수 있다.

이야기는 단편극 같은 완성도를 지닌 채 유저를 자극한다. 많이 즐길수록, 사이버펑크 2077은 거대한 세계관에 대한 이야기로 수렴된다. 디스토피아 속 종교와 사상, 전체감시 체제, 인공지능의 정체성, 집단과 개인간 갈등까지 세계 전반에서 나올 법한 화두가 숨어 있다. 미래 배경이지만, 과거이자 현재의 소재이기도 하다.

사이버펑크 2077의 스토리가 고스란히 RPG 장르의 경험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유저의 선택은 V의 결말을 정할 뿐 V의 정체성을 완성하진 못한다.

서구권 RPG에서 중요한 코드이자 사이버펑크의 테마 중 하나는, 플레이를 통해 '내가 누구인지를 완성하는 것'이었다. 그로 인해 등장한 개념이 가치관이다. 사회 규정과 나만의 신념 중 무엇을 따를 것인지, 정의와 실리 중 무엇을 우선시할 것인지.

최근 이 방면에서 탁월했던 RPG는 디스코 엘리시움이었다. 스토리의 큰 줄기가 선형적이라는 점은 같지만, 이 게임은 유저의 수많은 선택이 대부분 주인공의 내면에 영향을 준다. 기업의 편에서 인부들을 탄압할 수도, 민족주의자가 되어 외부인과 편을 가를 수도 있다. 이런 선택을 통해 세부 내용뿐 아니라 캐릭터 자체 특성까지 변화해간다.

D&D 룰을 바탕으로 한 발더스게이트나 네버윈터 나이츠 등의 작품은 당연히 성향에 따른 플레이가 분할됐다. 유저가 직접 고른 성향과 다른 NPC를 만나면 온도 차이가 극명했고, 전혀 다른 연합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굳이 클래식 RPG에서 꼽지 않아도, 매스이펙트와 폴아웃 시리즈 역시 좋은 사례다. 유저가 어떤 플레이를 하느냐에 따라 주인공 자신의 캐릭터는 변화해간다. 플레이 방식도 달라지면서 나만의 경험을 할 수 있다. 굳이 엔딩에서 분기를 만들지 않아도 가능하다.

사이버펑크 2077은 좋은 세계관과 스토리를 구비했지만, 그 이상의 구조를 보여주지 못했다. V가 가진 선택지는 철저하게 자기 생존을 중점 가치로 고정시킨 채 머무른다. 중반까지 유저가 선택하는 소재는 상욕을 조금 더 찰지게 날리는 것, 특정 인물에게 조금 더 관대하거나 쌀쌀맞게 대하는 것 정도다.

플레이에 따라 살상과 비살상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고, 모든 적 비살상도 가능하다. 하지만 그 선택의 차이가 미미하다. 심지어 모든 스토리 주요 인물을 쓰러뜨린 뒤 살려놔도 게임에서 달라지는 경험은 전혀 없다. V가 '내 캐릭터'라는 만족감을 유저가 받기 어렵다. 감정 몰입에 따라 차이가 갈릴 수 있는 부분이다.

위쳐3 메인스토리가 필요 이상으로 길었다면, 사이버펑크 2077은 필요보다 짧다. 나이트시티 각 지역의 갱단은 특색이 매우 선명한데, RPG 콘텐츠로 녹여내기 적절한 소재임에도 불구하고 목스를 제외하면 크게 활용되지 못했다. 여백이 너무 많이 남아버린 미래 미술을 보는 듯하다.

전투의 액션 퀄리티가 RPG에서 갖춰야 할 필수는 아니다. 다만 성장 체감과 유연한 조합은 중요하다.

자동으로 적을 맞춰주는 스마트 조준, 충전해서 쏘는 관통 총알 등은 재미있는 요소다. 하지만 초반 사이버펑크 문명에서 느끼는 놀라움은 후반까지 이어지지 못한다. 생각보다 조합이 다채롭지 않기 때문이다. 더블 점프나 고릴라 암 같은 사이버웨어도 다른 옵션과 연계될 만한 요소가 없다.

3개 출신배경 중에서 골라 플레이하는 라이프패스 시스템 역시 몇몇 대사 말고는 큰 차별점이 없다. 사전 정보공개에 비해 괴리감이 커서 아쉬움이 남는다. 사전 리뷰코드로 평가를 내릴 시점에는 이런 부분을 교차검증할 수 없는데, 좋은 사전 평가를 위한 눈속임이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다.

인터페이스와 밸런싱 문제도 RPG 경험을 방해한다. 사이버펑크 2077의 UI는 AAA급 게임 중 최악에 가깝다. 인벤토리, 제작, 사용 아이템, 지도, 일지 등 모든 메뉴가 유저를 불편하게 하는 구조로 가득하다.

60시간 플레이 동안 게임이 지루하다고 느낀 적은 없다. 나이트시티는 끝까지 질리지 않는 비주얼로 무장했고, 잘 짜인 시나리오의 한 축을 보여줬다. 심리스 월드에서 구현했음에도 불구하고 스토리 전투 연출은 곳곳에서 인상적이다. 그러나 지금, 이야기 흐름을 가로막는 장애물은 지나치게 많다.

사이버펑크는 미래를 다루는 동시에 오래된 세계관이다. 사이버펑크 2077은 '선택'할 필요가 있었다. 2020년 버전으로 재해석, 혹은 혁신한 사이버펑크를 보여줄 수 있었다. 아니면 클래식의 감성을 완벽하게 살리는 방향도 가능했다. 하지만 그 중간 어딘가에 머물렀다. 결국 기대치에 비해 구조는 헐거워졌다.

버그를 수정하고 조금 더 콘텐츠를 채워낸다면 다시 나이트시티를 찾아갈 용의는 있다. 또다른 매력을 뿜어낼 가능성은 충분하다. 그만큼 미완성된 지금 시기가 아쉽다. 많은 단점들을 끌어안고서도 재미가 있었기 때문에, 더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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