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전 시리즈에 대한 추억은 1996년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초등학교 시절, 생일에 부모님과 함께 컴퓨터 매장을 찾아가 고른 게임이 창세기전이었습니다. 점원에게 영업당한 멘트가 아마 "국산게임 최고 대작"이었을 겁니다. 생애 처음 구매한 게임패키지라, 기억이 생생할 수밖에 없습니다.

부푼 기대감 속에 디스켓 10장 설치를 마쳤고, 게임은 버그로 가득했지만 재미있었습니다. 그 시절에는 버그인 줄도 모르고 지나친 부분도 많아요. G.S가 기억을 각성하는 결정적 장면에서 '창세기전2에서 이어집니다'라는 메시지와 함께 게임이 끝났습니다. 이 궁금증은 못 참죠. 다음해 생일선물은 창세기전2로 이어졌습니다.

그 게임이 25년 만에 완전히 달라진 채 돌아옵니다. 창세기전: 회색의잔영을 지난달 라인게임즈 발표회에서 시연할 수 있었죠. 새로운 모습에 대해 여러 의견이 교차합니다. 하지만 그 낯설음이 오히려 반가웠습니다.

추억은 추억이고, 게임을 향한 평가는 별개로 냉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창세기전 시리즈는 모든 작품을 통틀어 유사한 장단점을 가졌습니다. 

가장 큰 장점은 광대한 세계관, 그 속에서 펼쳐지는 비극적 서사를 들 수 있습니다. 스토리가 전개되면서 교차되는 캐릭터 묘사도 훌륭합니다. 중요한 씬에서 내러티브와 음악도 감성을 자극합니다. 창세기전3에 이르러 화려한 성우진의 열연도 큰 장점이 됐고요. 

반면 SRPG로서 평가를 크게 깎는 단점도 존재합니다. 캐릭터 성능을 스토리에 극단적으로 맞춘 나머지 밸런스가 망가졌고, 초반 플레이 외에는 전략성도 없습니다. 전투가 게임 서사를 위한 도구 정도에 머무르는 위치입니다. 최근 해명이 있긴 했지만, 초기 작품들의 스토리 표절 논란도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였습니다.

창세기전 리메이크는 원작 장단점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습니다. 세계관과 스토리라인은 그대로입니다. 그래픽 및 일러스트는 리메이크인 만큼 새롭게 구성했고, 전투 시스템은 원작 특징을 대부분 없앴습니다. 대신 무난하고 보편적인 SRPG의 재료로 채웠습니다.

원작 시스템을 그대로 가져와야 한다거나, "TP 시스템이 없으면 창세기전2가 아니다"라는 부정적 의견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TP 개념은 당시 독특한 개성이었으니까요. 리메이크 전투 시스템에 특별한 개성이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리메이크의 방향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원작을 그대로 되새기는 선에서 끝내도 된다면 리마스터에서 끝내도 됩니다. 창세기전 리메이크는 제작진이 인터뷰에서 밝혔듯, IP를 다시 일으키고 리부트하기 위한 대작업에 속합니다. 그 목적을 위해서는 지금 시대 유저들에게 재미를 줄 작품이 나와야 합니다.

TP 시스템은 캐릭터별 게이지가 허락하는 만큼 한턴에 행동을 반복할 수 있었습니다. 신선했지만, 밸런스가 파괴되는 핵심 이유였습니다. 원작 창세기전2는 단 하나의 조건으로 캐릭터의 가치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광역기를 쓸 수 있느냐'가 그것이죠. 

게임 중반이 넘으면 전투마다 제자리에서 대기하며 TP를 모으고, 전체마법과 초필살기를 난사했습니다. 같은 플레이를 반복한 뒤 남은 적들을 대충 처리하면 전투가 끝났습니다. 양군의 대병력이 자웅을 겨루는 웅장한 전투가 되어야 하는데, 현실은 서로 멀리 떨어져 광역기만 난사하는 게임이 된 겁니다.

더군다나 육성의 의미도 전혀 없었습니다. 모든 캐릭터는 스토리에만 의존해 자동으로 합류하거나, 이탈하거나, 막강해지거나, 약해집니다. 그중 상당수는 영원히 쓰지 못하기도 합니다. 

수많은 플레이어블 캐릭터 중 게임에 의미를 두고 존재하는 캐릭터는 극소수였습니다. 특히 마법사와 궁수 계열 편차는 심각합니다. 마법사가 무조건 좋았다고 기억하는 경우도 많지만, 광역마법을 못 쓰거나 쓰기 어려운 캐릭터는 반대로 존재의미가 0에 수렴했습니다. 위에 말한 이유로 육성도 의미가 없었고 말입니다.

리마스터는 보존이지만, 리메이크는 '확장'입니다.

리메이크로 시스템을 바꾼다고 해서 정체성을 제거하는 것은 아닙니다. 파이널판타지7처럼 반턴제에서 실시간 액션으로 아예 장르 자체를 바꿔버린 사례도 있습니다. 취향이 갈릴 수 있지만, 그 자체로 비판을 받을 여지는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시연 버전이 만족스러운 이유였습니다. 창세기전 리메이크 전투는 비록 개성이 사라지더라도, '즐길 만하게' 만드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TP 시스템을 그대로 넣었다면 '고전 명작 SRPG'란 이름에 어울리는 개발은 쉽지 않았을 겁니다.

물론 창의적이면서도 세련된 신규 시스템을 넣으면 최고였겠지만, 이 정도면 훌륭한 차선책이라고 볼 만합니다. 그래픽과 연출도 닌텐도 스위치 기준에선 무난하고요. 원작을 모르던 신규 유저도 시리즈 최고 매력인 세계관과 스토리를 경험하기 충분한 조건입니다. 

창세기전 리메이크를 향한 요구는 제각각일 수밖에 없습니다. 원작 평가부터 극단적으로 나뉘고, 유저에 따라 즐기고 싶은 포인트도 다릅니다. 어느 시리즈부터 입문했는지, 혹은 아예 접한 적이 없는지 여부도 다릅니다. 세월이 너무 흘렀으니 당연한 현상입니다.

과거를 완전히 버린 것 역시 아닙니다. 전투에서 취할 만한 부분은 취했습니다. 캐릭터 방향 지정과 후방-측면 대미지 보정이 대표적이죠. TP 개념은 필살기를 쓰기 위한 리소스로 재편됐고요. 연, 비, 혼 같은 물리 캐릭터 스킬 역시 체계적으로 정리했습니다. 원작보다 밸런스도 잘 맞아 보입니다. 적어도 초중반 파트에서는 말입니다.

창세기전2의 세계관과 이야기를 그대로 남기거나 더 발전시키고, 그 위에 무난한 현대식 SRPG 시스템을 넣는다면 충분히 좋은 리메이크로 완성될 것입니다. 한 가지는 확실합니다. 이번 시연에서, 썬더둠 요새 공방전은 정말로 공방전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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