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은 <비포…>시리즈를 통해 시간을 영화 안으로 끌어들이는 놀라움 경험을 전해 준 바 있습니다. 9년 마다 이루어지는 두 남녀의 만남을 실제 시간에 맞추어 촬영하였고, 그 결과 두 주인공의 감정이 마치 관객의 그것처럼 느껴 지게끔 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쌓여 가는 무형의 가치가 얼마만큼의 힘을 갖고 있는지 보여 준 연작이었습니다.

<보이 후드>는 <비포…>시리즈의 이런 실험을 더 첨예하게 파고든 영화입니다. 여섯 살 소년을 캐스팅 해 12년간 일년에 한번씩 촬영하는 방식으로 완성되었습니다. 주인공 외에 다른 배우들도 마찬가지로 12년간 꾸준히 함께 해 왔습니다. 영화 안에서 배우들은 실제로 나이를 먹습니다. 주인공 소년인 메이슨 주니어 역의 엘라 콜트레인이 서서히 자라 가는 모습도 놀랍지만 그의 아버지 역의 에단 호크와 어머니 역의 페트리샤 아케이트 역시 주름이 늘고 군살이 늘고 머리숱이 적어집니다.

놀라운 영화입니다. 영화라는 매체의 근본적인 가치가 ‘경험(상상할 수 있는 경험까지 포함하는)의 시각화’라고 볼 때, 뤼미에르 형제의 <열차의 도착>을 보며 사람들이 놀라서 도망을 치는 것과 같은 반응이 영화가 관객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경험일 것입니다. 제임스 카메론의 <아바타>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판도라 행성을 손에 잡힐 듯이 생생하게 표현하여 충격을 주었고,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그래비티>가 숨이 멎을 듯한 우주의 경험을 관객에게 전달하였다면, <보이후드>에서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은 시간을 압축하여 시각화 함으로써 그것을 보는 관객에게 시간이 쌓이며 뿜어내는 감정을 생생하게 경험할 수 있게 해줍니다. 문자 그대로 숨이 멎을 것 같은 경험입니다. 실제로 십 수년이 지난 후에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는 감정, 바로 그것입니다.

<보이 후드>의 이야기 자체는 놀라울 것도 새삼스러울 것도 없습니다.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의 영화 스타일 그대로입니다. 그의 영화에 나올 법한 캐릭터가 나와 그의 영화에 늘 나왔던 것 같은 대사들이 나옵니다. 메이슨 주니어와 그의 누나 사만다는 어떻게든 두 아들딸과 함께 생활을 영위하려는 엄마와 몇 번의 이사와 몇 번의 새 아빠를 맞이하고 매주 찾아오는 친부와 허물없는 일상을 보내기도 합니다. 연애를 하고, 실연을 하기도 하며 진로와 적성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합니다.

사실 <보이 후드>의 이야기는 미국과 한국이 갖는 문화권의 차이 때문에 정확하게 그 뉘앙스를 파악하기가 어렵습니다. 평범한 미국 가정의 이야기일 것이다, 라고 짐작은 할 수 있지만 그것이 실제로 미국인에게 그렇게 느껴 질 지는 모르겠습니다. (특히 이혼 후에 전 남편이 전 부인의 새로운 남편과 살갑게 지낸다던가 하는 점이 가장 낯선 문화겠습니다.) 아쉬운 점은 그 문화권의 차이에서 오는 괴리감으로 이 놀라운 영화가 주는 경험을 일정 부분 놓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영화의 뉘앙스를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감정’적으로 오롯이 받아들이기는 힘듭니다. 경험을 놀라운 방식으로 시각화한 영화를 감상할 때에 가장 아쉬운 부분입니다. 비유하자면 우주나 무중력에 대해 한번도 상상하지 못했던 사람이 <그래비티>를 보며 많은 부분을 놓칠 수 있는 것과도 같습니다.

하지만 <보이 후드>가 가지고 있는 시간에 대한 체험은 인류 보편적인 것이므로 여전히 마음 속 깊숙이 와 닿습니다. 영화 외적인 시간의 흐름이 스크린 안으로 투영되고, 영화 내적으로 흐르는 시간이 그 밖으로 튀어나와 우리에게 그들의 감정을 전달합니다. 광범위하게 보자면 우주의 탄생과 소멸을 몇 분에 안에 담은 우주 다큐멘터리와 일맥상통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런 종류의 영상에서 느낄 수 있는 우주적인 광활함을 <보이 후드>는 선사합니다. 실제로 영화 안에서 시간이 ‘흐르도록’ 함으로써 순간을 영원으로 환원하는, 시간을 켜켜이 중첩시켜 오히려 그 유구함을 보여 주는 셈입니다.

영화 안에서 흐르는 이야기 역시 이런 시도와 잘 결부됩니다. <보이 후드>가 일반적으로 역사나 시간을 다룬 다큐멘터리와 다른 점이 이 지점입니다. 시간을 다루지만 ‘픽션’이라는 것입니다. 메이슨 주니어는 나이를 먹어 가며 어렴풋이 갖고 있던 인생에 대한 고민을 점점 심화시켜 나아갑니다. 사실 그 요지는 ‘인생의 요점이 무엇인가’라는 것입니다. 왜 엄마는 상처를 입으면서도 새로운 남편을 만나는걸 반복하고, 왜 나는 실연의 아픔에 아파하면서 새로운 시도를 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가, 와 같은 근본적인 질문입니다. 아마도 그 질문에 대한 감독의 답은 메이슨 시니어, 에단 호크가 말하는 ‘아무 의미도 없어’에 가깝지 않을까 싶습니다. 물론 비아냥거리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인생을 받아들이라는 의미입니다. 영화 내에서 시간이 쌓이는 과정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오래도록 쌓인 시간의 무게가 더 무겁고 그 이전의 시간들이 가볍다고 단언할 수 없고, 결국 흐름 자체의 의미보단 ‘순간이 영원’하다는 것을 깨닫고 매 순간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감독이 고심해서 고른(12년간 함께 촬영 해야 하는 배우를 캐스팅 할 때의 중압감은 어땠을지 궁금합니다.) 배우들의 열연, 감독 특유의 재치가 돋보이는 대사들, 각 시대상을 정말로 가감 없이 보여 주는 소품들(영화가 끝나고 예전 핸드폰과 게임기 같은 소품들은 어떻게 다 구했을까?하는 의문을 가졌다가 멍청한 자신을 탓했습니다. 모두 그 당시 유행했던 걸 찍었을 뿐인데 말입니다.)과 스코어 등 영화 내적으로도 완성도가 훌륭합니다. 사실 이 영화를 촬영한 방식이 굉장하다고 해도 완성도가 지탱해 주지 않는다면 그저 신선한 시도로만 평가되었을 것입니다.

영화를 보고 나서면, 극장에서 느꼈던 감정들이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간접 체험을 한 것이 아니라 실제 나의 인생에 대한 감정이란 걸 알 수 있습니다. 시간을 몸소 체험하고 있는 인간이라면 누구든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그렇기 때문에 나이에 따라 감상 후 감정의 폭이 천차만별일 수도 있겠습니다.)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많지 않을 영화입니다. 새삼 영화라는 매체가 얼마나 사랑스러운지에 대해 다시 한번 느끼게 해주는 영화이기도 합니다. 아마도 동시대에 개봉한 이 영화를 놓친다면, 오래도록 후회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필자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글 : 이해웅(http://yarkteim.blog.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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