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놀란 감독의 신작이 항성간 우주 여행을 다룬 SF영화라는 것을 처음 들었을 때부터 개봉 직전까지, 기대 반 우려 반의 심정이었습니다. 사실 그 기대감과 우려감은 모두 SF영화와 놀란 감독의 영화에 대한 개인적인 애정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저를 비롯하여 SF영화와 놀란 감독 영화의 팬들이라면, SF영화의 매력적인 장르 속성과 놀란 감독의 연출 방향이 어떤 식으로 결합 될 것인가에 관해 많은 추측을 해왔습니다만, 사실 기대감에 비해 우려가 큰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전작인 ‘다크나이트 라이지즈’에서 보여주었던 단점을 밀어붙이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이 컸던 탓이었습니다.

놀란 감독의 장점이라면, 이리저리 꼬인 플롯을 테크니컬하게 스크린에 풀어내는 것과 상상을 CG가 아닌 최대한 현실에 가까운 방법으로 표현하여 디테일과 스케일을 함께 실현하는 일종의 장인 정신이 있겠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보았을 때, 결국 그는 이야기꾼에 가깝기 보단 일종의 엔지니어에 가까운 감독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의 필모그래피를 보면, ‘메시지’에 집착한 영화들 보다 ‘형식’에 공을 들인 영화들이 더 좋은 만듦새를 보여왔습니다. ‘다크나이트’와 ‘다크나이트 라이지즈’의 경우가 가장 확연하게 비교되는 케이스가 되겠습니다. ‘다크나이트’의 경우 배트맨과 조커라는, 양극이기에 오히려 다른 인물보다 공통점이 많아 보이는 두 ‘상징’을 중심으로 고담시티의 사람들을 휘몰아친 결과 오히려 꽉 짜여진 형식 속에서 더 진한 메시지가 도출되었고, ‘다크나이트 라이지즈’의 경우 배트맨이라는 상징을 통해 거대한 담론을 이야기하려고 한 결과 (삼부작의 마지막을 멋지게 장식한 것과는 별개로) 그 메시지에 영화적 만듦새가 매몰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인터스텔라는 식량문제로 말미암아(그리고 거기서 촉발된 산소결핍 현상) 종의 위기를 맞은 인류가 지구를 떠나 새로운 항성계에서 살아갈 터전을 탐색하는 이야기입니다. 네, 그렇습니다. SF영화로선 진부하기 짝이 없는 설정입니다. 다크나이트 트릴로지를 제외하고 오리지널 각본을 가지고 그가 연출한 영화에서, 이렇게까지 단순한 플롯을 가지고 있는 영화는 거의 유일한 것 같습니다. 영화 안에 등장하는 상대성이론, 웜홀, 블랙홀, 3차원 이상의 우주에 대한 설정 등이 조금 이해하는데 복잡하게 느껴질 순 있습니다만, 그것은 현상 자체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일 뿐이지 이야기가 미로처럼 꼬여있는 것은 아닙니다. 서사 자체가 뒤집히는 중대한 반전도 없습니다. 인터스텔라에서, 놀란 감독은 소위 스필버그식 정공법을 밀고 나갑니다.

결과적으로, 인터스텔라는 기존에 보아왔던 SF영화들이 가진 진부한 요소들의 총집본 같은 영화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놀란 감독의 테크닉, 엔지니어적인 편집증이 마법을 부립니다. 서사와 감정을 최대한 원초적이고 올곧게 밀고나가며, 세계를 묘사하는 데에 온 힘을 쏟은 결과 장대하고 웅장한 결과물이 탄생했습니다.

먼저 SF영화라는 측면에서, 과학적으로 일어날 수 있을 법한 상상을 스크린으로 옮긴 영화 중에, 현존하는 가장 최신의 기술과 법칙을 정확하게 적용한 영화가 되었습니다. 웜홀과 블랙홀을 위시한 각종 과학적 현상이 그야말로 경이롭다고 밖에 말할 수 없는 방식으로 화면에 표현됩니다. 극 중 캐릭터들이 놀란 감독의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사랑’과 ‘선의’, 진부한 표현을 빌리자면 ‘머리보다 가슴’을 외치지만, 마지막까지 과학적인 법칙에 크게 저해되지 않는 방식으로 사건이 해결되어갑니다. 항성 간 이동을 다룬 SF영화 뿐만이 아니라 많은 SF영화들이 결말에 이르러 불가지론에 기대는 경우가 많은 데에 비해, 하드 SF영화로서 뚝심 있게 설정을 밀어붙입니다. 특히 계속 정보를 노출했던, 웜홀과 블랙홀에 관한 묘사는 우주공포(!)가 느껴질 정도로 기괴할 정도로 아름답습니다. 블랙홀 안에서 일어나는 5차원적인 현상에 대한 묘사 역시, 아름답고 독창적으로 시각화되어 있습니다.

이야기의 진행 자체는 앞에서 언급했다시피 아주 단순하고 원초적인 감정들을 불러 일으키기에 보는 사람에 따라 신파조로 보일 수도, 혹은 지루하게 들릴 수도 있겠습니다. 지구의 종말(이라기 보단 인류의 종말)을 맞이하는 방식이 너무나 평화로운데다 단순히 식량문제라는 설정이 조금 걸리긴 합니다만, 이야기를 평소 연출방식대로 꼬아서 풀어내지 않고 정직하게 밀어 붙인 것은 좋은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훌륭한(말 그대로 훌륭하다고 밖에 말할 수 없는 커리어의) 배우들의 연기에 힘입어 이 정직하고 단순한 이야기는 꽤 큰 울림을 전해줍니다. 중반 이후 클라이막스로 치닫는 부분에서 교차편집을 통해 감정선을 끌어올리는 즈음에서 이야기의 힘이 좀 약했던 것이 단점이라면 단점이겠습니다.

본디 영화 인터스텔라의 본체는 가족영화이지만, 어린시절 감명깊게 보았던 프론티어 정신이 넘치는 가족영화의 그것을 거의 완벽하게 재현하고 있습니다. 아닌게 아니라 전성기의 스필버그 영화를 보는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우주에 대한 동경을 가진 소년/소녀라면 이 영화를 보고 가슴이 뛰는걸 한동안 멈추기 힘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어린 시절 좋은 영화를 보고 나면 늘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J.J. 에이브럼스 감독 역시 ‘슈퍼 8’ 등을 통해 그런 감정을 재현하려고 노력했지만, 중요한 것은 어찌보면 테크닉과 각본의 흉내가 아니라 감독 자신의 프론티어 정신이 아닌가 싶습니다. (J.J. 에이브럼스 감독도 훌륭한 테크니션이긴 합니다만)인터스텔라의 디테일들은 감독과 스텝이 그들을 한계까지 밀어붙였다는게 몸으로 와 닿을 정도로 대단합니다. 우주의 모습이며 우주선 안의 모습이며 각종 기계장치들까지, 아날로그적 디테일로 넘쳐납니다. 여기서 ‘아날로그’란 디지털의 반대의미가 아닌, ‘현실적’이란 의미에 가깝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인상만으론 유머가 거의 없고 저지방 참치 살코기 살처럼 퍽퍽할 것 같은 영화지만, 인간 출연진들에게 없는 유머감각을 로봇(…)들이 가지고 있습니다. TARS와 CASE 두 대의 로봇은 오랜만에 보는 독특하고 개성 넘치는 비인간형 캐릭터입니다.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의 모노리스를 오마쥬한 것이 분명해 보이는 사각 기둥 모양의 로봇인데, 여러모로 영화에 활기를 불어넣어주는 역할을 합니다. 둔탁하게 생긴 겉모습에 비해 작동하는 방식도 놀라울 정도로 참신합니다. 그러고보면, 인터스텔라는 SF영화 팬으로써 매력을 느낄만한 것들을 종합 선물세트처럼 우겨 넣어놓은 영화 같습니다.

이번에도 놀란 감독과 합을 맞춘 한스 짐머의 스코어는 여전히 웅장합니다. 극장 의자를 울리는 웅웅거리는 저음도 여전합니다만, 후반 교차편집 부분에선 너무 웅웅거리는 통에 대사가 잘 들리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해상력이 좋은 사운드 시스템을 가진 극장이라면 모르겠습니다만 그렇지 않은 극장에선 클라이막스에서 대사가 잘 들리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우리나라와 같은 외국에선 자막으로 대사를 볼 수 있으니 관계가 없긴 합니다만, 미국을 비롯한 영어권 포럼에선 이런 문제가 심심치 않게 제기되나 봅니다. 일부 장면에서 심하게 울리는 것을 빼곤 전체적으로 비장한 분위기에 잘 맞습니다.

영화의 성격상, 보다 큰 스크린에서 보는 것이 영화를 온전히 즐길 수 있는 방법입니다. 모든 영화가 극장에서 보는 것이 올바른 감상방법이긴 하지만 인터스텔라의 경우 더욱 그렇습니다. 아이맥스 포맷으로 촬영된 장면이 굉장히 많기 때문에 최우선적으로 아이맥스 관에서 관람을 하시는 것이 좋고, 여의치 않다면 무조건 크기가 큰 상영관을 찾으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상영관의 크기와 박력에 따라 아예 존재감 자체가 다른 영화가 되어버립니다. 올해의 SF영화는 ‘그녀’에게 돌아갈 것이라고 잠정적으로 결정해 놓은 상태였습니다만(그리고 거기엔 인터스텔라가 기대에 미치지 못하리란 선입견이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인터스텔라가 그 자리를 빼앗아 갈 것 같습니다. 물론 ‘그녀’ 역시 좋은 영화였지만 상상을 시각화하는 방식과 스케일 면에서 아무래도 인터스텔라의 손을 들어줄 수 밖에 없겠습니다. 아마도 명작 SF영화들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몇 안되는 웰메이드 SF영화로서 오랫동안 회자될 것이라 생각됩니다.

덧 : ‘우주’가 주제라는 면에서 작년에 개봉한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그래비티’와 많이 비교를 당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사실 ‘그래비티’는 SF영화라기 보다 우주가 소재인 재난 체험 액션 블록버스터에 가깝습니다. 그래비티에 등장하는 기술들은 실제로 재현이 가능한 것들이고, 우주에 대한 과학적인 상상력에 기반하여 그것을 확장시키는 서사구조는 아닙니다. 다시 말하자면, 인터스텔라와 그래비티는 서로 다른 장르에서 각자 훌륭한 완성도를 보이는 영화입니다. 비교의 의미가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필자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글 : 이해웅(http://yarkteim.blog.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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