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 유년기와 90년대 청소년기를 거치며 트론이나 론머맨 같은 가상현실을 주제로 한 영화들을 보면서 '언젠가는 저런 가상현실 속에서 게임을 즐기는 일이 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한 적이 있다. 

이러한 기대감을 만족시킬 수도 있는 기회는 생각보다 빨리 다가왔다. 1995년에 닌텐도가 버추얼보이를 출시하면서 가상현실 게임을 즐길 수 있게 된 것이다. 

영화 트론에서 봤던 것처럼 가상현실 공간을 뛰어다니는 내 모습을 상상하며 어린 나이에 힘들게 버추얼보이를 손에 넣었지만, 그런 기대는 한 번에 무너졌다. 

기자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버추얼보이의 이미지는 '빨간색'이다. 빨간색 외형과 적색 LED만 사용된 탓에 온통 빨갛게만 그려지는 게임 그래픽 때문이다. 플레이 중에 흘렀던 눈물이 빨간 화면에 안구가 자극되서 흐른 것인지, 돈이 아까울 정도의 실망감 때문에 흐른 것인지는 지금도 아리송하다.

그로부터 약 20년이 지난 지금. 다시 한 번 가상현실 게임이 게임업계의 화제로 떠오르고 있다. 오큘러스 리프트, HTC 바이브, 기어 VR, 플레이스테이션 VR등 PC, 스마트폰, 비디오게임기를 아우르는 다양한 플랫폼으로 일제히 VR(Virtual Reality) 기기가 출시를 기다리고 있으며, 이러한 분위기를 감지한 개발사들은 VR 관련 게임을 준비 중이다.

게임사를 돌아볼 때 공간과 시야의 확장은 게임성의 발전에도 영향을 줬던 것을 알 수 있다. 사이드뷰, 쿼터뷰, 3D 등으로 게임 내 공간이 확장함에 따라 게임 속 캐릭터들의 운신 폭이 함께 넓어졌고, 이는 게임 속에서 개발사도 게이머도 다양한 시도를 할 수 있는 배경이 됐다.

VR은 이러한 게임 내 공간이 다시 한 번 극적으로 넓어지는 사례다. 게이머가 아예 현실과 구분된 게임 속 공간에 몸을 담그는 상황을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이러한 특성 덕분에 VR은 게이머들에게 '또 다른 즐거움을 찾을 수 있는 기회'로 여겨지기도 했다. 

하지만 VR 관련 기기들에 대해 마냥 낙관적인 시선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출시가 구체화됨에 따라 회의적인 시선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VR 기기 앞에 펼쳐진 미래가 마냥 분홍빛, 장밋빛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부정적인 의견이 퍼지기 시작한 것은 오큘러스 리프트의 가격 발표가 단초가 됐다. 오큘러스는 저렴한 가격에 VR 기술을 알리겠다는 포부를 밝혔고, 개발기기인 DK1, DK2를 각각 300달러와 350달러에 보급하며 시장을 활성화 시켰다. 

하지만 정식 출시버전 가격이 599달러로 공개되면서 분위기는 반전됐다. 마땅한 VR 소프트웨어가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이 정도의 가격을 주고 기기를 구매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이다. 또 다른 VR 기기인 HTC 바이브의 가격 역시 799달러로 공개됨에 따라 가격 이슈는 VR에 대한 기대감을 한 풀 꺾이게 만들었다.

기기가 갖는 성능이 아직은 한계가 있다는 점도 게임 시장에서의 VR 보급을 다소 회의적으로 보게 만드는 원인으로 꼽힌다. 오큘러스 리프트의 3세대 버전이라 할 수 있는 크레센트 베이와 플레이스테이션 VR을 직접 체험해 본 경험을 토대로 말하자면 이들의 그래픽은 기대이상으로 뛰어나지만 현재 출시된 게임들과 비교한다면 많이 뒤쳐지는 수준이었다. 

물론, 공간감에서 오는 현장감은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지만, 그래픽 자체가 주는 현장감은 오히려 떨어지는 수준이라 하겠다. 입체감을 위해 화면 2개를 동시에 그려내야 하기 때문에 그래픽 퍼포먼스는 일반적인 게임을 구동할 때보다 절반으로 떨어지며, 이는 프레임 저하와 해상도 저하를 야기한다. 공간감을 위해 해상도와 부드러운 움직임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웨어러블 기기의 특성 또한 기기가 널리 보급되는 데에 장애물이 될 수 있다. 콘텐츠를 즐기기 위해 내 시야를 차단하는 무엇인가를 얼굴에 뒤집어 써야 한다는 것은 여러모로 자연스럽지 못 하고 불편한 행동이다. 헤드마운트 디스플레이 시장이 오래 전부터 ‘나만의 시청공간을 제공한다’는 가치를 주장하며 존재했지만, 예상보다 커지지 못 한 것은 묵직하고 발열이 있는 물건을 얼굴에 달고 있어야 하는 것에 불편함을 호소하는 이들이 많기 때문이었다. 당장 머리에 커다란 헤드폰을 쓰고 게임을 하는 것도 불편하게 여기는 유저들이 있다는 것은 VR 기기 개발사들에 있어 여러 점을 시사한다.

물론 이런 불편함을 상쇄시킬 수 있는 확실한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다면 유저들은 얼마든지 이런 불편함을 감수할 것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확실한 VR 콘텐츠가 없다는 것은 VR 기기가 가정에 구비된 런닝머신, 안마의자 같은 처지로 전락할 가능성을 남긴다. 좋은 체험을 할 수 있고, 그로 인한 이득도 확실히 얻을 수 있지만 한 켠에서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그런 물건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아직 시장에 VR 기기의 보급이 널리 이루어진 상황이 아니기에 개발사들이 전폭적으로 VR 게이밍 시장에 뛰어들 수 만도 없는 상황이다. 오히려 VR은 게임보다 의료, 건설, 여행 쪽에 적합하며, 이를 지원할 수 있는 미들웨어를 개발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목소리도 들려온다.

아이러니하게 지금 언급된 모든 이야기들은 20년 전 버추얼보이가 갖고 있던 문제점과 일맥상통한다. 시대에 비해 떨어지는 그래픽, 편하지 않은 착용감과 얼굴에 뭔가를 장착해야 하는 어색함, 그리고 부족한 게임 소프트웨어까지 말이다. 

이러한 점들을 극복하느냐 극복하지 못 하느냐에 따라 VR 게이밍은 스마트폰 혹은 3D TV의 전례를 따르게 될 것이다. 스마트폰은 새로운 플랫폼으로써 게임 시장을 확장하게 만들었지만, 3D TV는 ‘신기하지만, 신기하기만 한 무엇’에 머무르고 말았다. VR 게이밍은 재미를 품은 보물상자가 아닐 수도 있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VR 기기는 여러 가능성을 갖고 있으며, 활용 여하에 따라 게임 시장에 격변을 불러올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증명된 것이 하나도 없으며, 새로운 기기가 무조건 새로운 즐거움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례는 역사를 돌이켜보면 대단히 많다. VR 기기의 향후 행보를 예측하기 어려운 이유다” 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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