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살던 동네에 가게 되면 묘한 기분에 빠져들게 된다. 그 동네의 현재 모습이 내 기억 속의 모습과 일치하는 면을 찾게 되면 반가움이 밀려오고, 내 기억과는 달라진 모습을 보게 되면 아쉬움이 밀려든다. 준비물을 사던 문방구, 떡볶이를 사먹던 분식집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커피숍이나 휴대전화 매장이 자리한 모습은 ‘인사할 틈도 없이 사라졌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일본의 게임 개발사 엘프(ELF)가 지난 3월 1일 자사 홈페이지를 통해 문을 닫는다는 소식을 전했다. 오는 3월 31일부로 문을 닫는다 하니 엘프가 역사 속으로 사라질 날이 보름도 남지 않은 셈이다. 그나마 이 소식을 미리 접하게 되어 적어도 ‘인사할 틈’은 갖게 됐다는 점은 다행이라고 할까?

90년대에 게임 좀 즐겼던 이들, 학창시절을 보냈던 이들. 2010년대에는 인터넷 커뮤니티 등지에서 아재라고 불리는 이들에게 엘프라는 이름은 진한 추억으로 남아있다. 판타지 소설에서 엘프라는 단어는 초자연적이면서도 자연과 하나되어 살아가는 신비로운 존재로 표현되지만, 우리가 이별을 준비하고 있는 엘프는 그런 이미지와는 전혀 거리가 먼 존재였다.

엘프는 그 시절 배우던 도덕, 윤리 교과서의 대척점에 있는 존재였다. 예쁜 그림과 예쁜 캐릭터들이 대거 등장하고 당시 청소년들은 이 캐릭터들과 함께 ‘19금의 세계’에 살포시 발을 내딛고는 했다. 90년대 초반에 엘프가 선보인 동급생은 ‘19금의 세계’, ‘어른들의 세계’에 왕성한 호기심을 갖고 있던 당시의 청소년들에게 보물상자와도 같은 역할을 했던 게임이다.

(1992년에 출시된 동급생은 일본 게임사에 있어서 나름대로 큰 의의를 지니고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연애 시뮬레이션 장르 붐을 일으킨 ‘도키메키 메모리얼’보다 2년 앞서 출시되며 이 장르의 공식을 나름대로 정립하기도 했다. 단순히 야한 장면만 가득한 도색잡지 같은 게임이었다면 성인게임 최초로 10만 장 이상의 판매고를 기록하지 못 했을 것이다)

10대 시절의 나에게 동급생은 호기심을 충족시켜주는 게임이었다. 다른 친구들이 몰려다니며 몰래 보던 ‘빨간 딱지 비디오’와 같은 역할을 했다 할 수 있다. 하지만 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 엘프는 ‘빨간 딱지 비디오’에서는 알 수 없는 가치를 동급생을 통해서 알게 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2014년작 영화인 킹스맨: 시크릿 에이전트에서 해리 하트(콜린 퍼스)가 한 ‘매너가 사람을 만든다’(Manner Maketh Man)이라는 말은 당대의 유행어가 됐다. 사실 동급생에서 ‘뜻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서는 매너를 철저하게 지켜야 했다. 

시간 약속을 철저히 지켜야 하며, 자기 주변 사람들에게 항상 친절하고 진솔하게 다가가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동급생 플레이 내내 엘프는 상기시켰다. 시간을 지키지 않으면 이벤트가 발생하지 않고, 상대에게 불친절하고 진심을 다 하지 않으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가 좁혀지지 않는 것이 동급생이라는 게임을 관통하는 구성요소였다. 

시간 약속을 잘 지키고, 주변 사람들에게 무례하지 않고 친절한 사람을 싫어할 이는 없다. 킹스맨의 해리 하트가 매너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보다 22년이나 앞서서 엘프는 이런 가치를 나도 모르는 사이에 동급생을 통해 나에게 알려줬다.

현실에서도 이런 사나이로 살아간다면, 누구에게나 좋은 평가를 받은 훌륭한 사나이가 될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물론, 게임 속에서와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겠지만 말이다.(…특히 작중 주인공 앞집에 사는 캐릭터의 경우와 같은 일은 벌어져서는 안 되지만!) 

이런 엘프가 이제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떠난 후에도 지금까지 자신들이 출시한 게임들의 사후 지원은 약속했다. 가는 마당에도 참 친절한 엘프다. 누군가는 이 글을 보며 성인용 게임에서 무슨 교훈을 얻었냐고 할는지 모르겠다. 너무 오버하는 것 아니냐는 말도 나올 법하다.  

맞다. 오버 좀 했다. 하지만 이제 정말 추억 속으로 사라져갈 기억 속의 큰 족적을 떠나 보내는데, 마지막 모습을 미화한다고 세상이 뒤집어 질 것 같지는 않다. 보내는 마당에 호들갑 좀 떠는 게 뭐 큰 대수인가. (다른 성인게임 개발사였다면 이런 반응은 보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PS: 그동안 신세 많이 졌습니다. 엘프 여러분. 비록 불법이기는 했지만요.

저작권자 © 게임인사이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