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도 일종의 관계잖아요. 그러니까 당연히 권력관계라는게 생길 수밖에 없고, 강자와 약자로 나뉠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아무래도 더 많이 좋아하는 쪽이 약자가 되는 거죠. 더 많이 기다리고 참아주는 쪽" 

- 드라마 '연애의 발견'
 

모든 크리에이티브 산업은 팬덤이 존재한다. 자연스러운 동시에 바람직한 현상이다. 

제작자가 특유의 스타일이 강하고 품질이 꾸준하다면 믿고 따르는 팬은 늘어난다. 이후 제작사는 수익과 팬의 만족 사이에서 '밀고 당기기'를 되풀이한다. 그 과정에서 흥행을 이끌고 팬덤을 확장시킨다. 게임시장 역시 훌륭한 게임사일수록 고정 팬덤이 늘어난다. 게임사와 오랜 팬들의 관계는 연인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연애 과정에서 절대 전달하면 안 되는 시그널이 있다. "나에게 너는 우선순위가 높지 않다". 진실이든 아니든, 상대방이 그렇게 느끼는 순간 이성은 무의미해진다. 블리자드 제이 알렌 브랙 대표의 13일 공지는 그 시그널을 전달해버렸을 가능성이 높다. 

히어로즈오브더스톰(이하 히오스) 개발 인력 일부를 다른 프로젝트에 이전하고 e스포츠 대회 HGC(Heroes Global Championship)를 중단한다는 것. 결정 내용은 비판할 점이 없다. 어떤 게임이든 실패할 수 있다. 실패했다 판단하면 개발력을 축소하고 대회를 없애는 일 역시 정당하다. 만일 서비스 종료에 이르더라도 마찬가지다.

문제는 과정이다. 예의와 감정을 고려하지 못했다. 

게임에 대한 흥미와 '팬심'은 같은 듯 하지만 별개다. 팬으로서 마음이 식는다면, 그것은 게임을 즐기고 콘텐츠를 평가하는 프레임부터 달라진다는 것을 뜻한다. 더욱 냉정해지고, 참을성은 사라진다. 현실을 자각해버린 연인 관계처럼.

 

"머무는 일보다 더 힘든 것은 떠나는 일이야"
- 영화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
 

2013년 칼럼을 통해 스타크래프트2 WCS 개편 내용을 비판한 적이 있다. 돌이켜보면, '을의 연애'가 복선으로 처음 깔린 것이 그 시점이었다. 

꾸준히 상승세를 그리던 GSL을 WCS 중 하나의 지역 대회로 재편하고 블리자드에서 직접 주관하기로 정한 것. 그러나 인위적으로 개편한 WCS는 삐걱거렸고, 그중에서도 한국 스타2 e스포츠의 파이가 오히려 줄어드는 부작용으로 이어졌다. 이번 히오스 논란과 핵심 공통점이 있다. 관계자들과 사전 상의 및 소통이 없었다. 특히 선수들과.

당시 선수들은 개편안 발표 당일에 소식을 접했고, GSL 개막전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이의를 제기할 기회도 없이 짧은 기간 동안 출전 지역을 골라야 했다. 프로게이머 인생이 달라질 수도 있는 중요한 선택이지만 지역별 세부정보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선수들은 그렇게 세계 각지로 흩어졌다. 군단의 심장이 출시되고 협회-연맹 선수들이 드디어 한 자리에 모이면서 관심이 올라가던 시점이었기 때문에 당시 블리자드의 선택은 더욱 아쉬움으로 다가왔다.

역사는 5년 뒤 '시공'에서 되풀이되었다. 더욱 좋지 않은 방식으로. 역시 사전소통은 없었으며 곧 열려야 했을 대회가 증발했다. 수백 명의 히오스 e스포츠 관계자 및 선수들이 하루아침에 실직자가 됐다. 

전세계 주요 히오스 팀들은 연달아 해체를 발표했다. 한국 히오스에서 가장 유명한 '리치' 이재원 선수를 비롯해 국내외 여러 선수가 스트리밍 도중 히오스를 삭제했다. 히오스 해설 및 통역을 담당하던 지클레프(Gclef)는 소식을 듣고 오열했다. 그가 눈물을 흘린 클립은 18일 현재 조회수 15만을 넘었다. 시청자들은 그 모습을 지켜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혀끝을 지나기도 전에, 벌써 지루해져버린 내 이름" 
- 아이유 '을의 연애'
 

가정해보자. 당신은 주말마다 이틀 동안 데이트하던 커플이다. 토요일 아침에 일어나 씻고 옷을 갖추어 입은 다음 약속 장소로 향했는데, 상대방에게 이런 문자 통보가 온다.

「오늘 너 안볼 거야. 앞으로는 일요일에만 만나기로 정했어. 내가 일도 바빠지고 집안 사정도 별로거든. 나도 참 어렵게 결정한 거다? 대신 일요일에 더 잘해줄 거니까 걱정하지 마」

기분이 어떨까. 총체적 난국이라 무엇부터 지적해야 할지 황당할 것이다. 사전에 '이런저런 사정이 있으니 데이트를 줄이면 어떻겠느냐' 논의했어야 하고, 이야기는 직접 만나서 하거나 적어도 전화 정도는 써야 했다. 거기에 며칠 전쯤 미리 이야기하거나, 다음 주부터 그런 식으로 하자고 말을 하는 것이 순서다. 이 경우는 누구나 '이 사람에게 나란 존재는 아무 것도 아니구나' 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어쩔 수 없었다고 해도, 미안하다는 말 한 마디는 전했어야 한다.

블리자드의 공지에 '미안', '사과', '유감' 같은 단어는 없었다. 

"우리가 선보이고 있는 '다른' 게임들과 진행 중인 모든 프로젝트에 어떤 의미를 갖게 될지에 대한 기대감"만을 밝혔을 뿐. 방점은 '다른 게임'에 찍힌다. 거기에 팬들을 향해 진정성을 담은 메시지도 마지막 인사 문장을 제외하면 없었다. 대부분의 문장은 오직 개발진의 시점에서 서술되었다. 블리자드 팬의 입장에서는, 사측이 자신들을 고려 대상에서 제외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당장은 블리자드 게임 성적에 큰 변화가 없을 것이다. 대부분의 게임은 고정팬이 확고하며 오버워치 e스포츠는 커다란 흥행 사례로 내년 시즌을 준비한다. 그러나 게임을 즐기는 것과 별개로, 마음 한구석에 자리잡을 불안감과 불신은 쉽사리 떨쳐내기 힘들다. 연애의 '갑을 관계'가 팬덤 심리에서 구현되는 과정이다.

히오스뿐 아니라 다른 블리자드 게임을 즐기던 팬들 역시 이번 일은 하나의 중요한 플래그로 각인될 수밖에 없다. 한번 일어난 일은 다시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 유저의 입장이 우선순위에서 밀려나 있다고 인식이 박힌 순간 어떤 비전을 제시받더라도 신뢰는 약해진다. 아무리 좋은 말을 속삭이고 예쁜 선물을 줘도, 한번 냉각된 마음에 감흥이 느껴지지 않는다. 상대를 냉정하게 받아들이게 되면 눈에 들어오지 않던 단점이 하나씩 인식된다.

권태기는 아무것도 아니다. 어쩌면 '이별 준비 기간'이 더 무서울지도 모른다.

 

"지금은 널 만날 이유와 만나지 않을 이유를 찾고 있어" 
- 애니메이션 '4월은 너의 거짓말'
 

블리자드의 이번 모습은 블리자드에게만 해가 되는 것이 아니다. e스포츠 산업 전체에 흉터처럼 선례가 남았다. 

HGC는 총상금 100만 달러 규모의 거대한 리그였다. 그런 대회가 게임사의 예고 없는 통보로 하루아침에 사라졌고 관계자들은 공중분해 됐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e스포츠를 향한 투자는 소극적으로 변할 위험이 크고, 선수를 포함한 팀 역시 안정감을 잃어버린다.

e스포츠와 게임 운영에 관한 발표 형식 역시 조금은 완화할 필요가 느껴진다. 지금까지 블리자드는 '깜짝 발표' 비중이 높았다. 의견 수렴이 부족하다는 지적도 함께 따라온다. 물론 오버워치 리그는 성공적인 결과로 인해 과감한 추진력으로 평가되지만, 앞서 말한 실패 사례도 무시할 수 없다. 올해 블리즈컨에서 반발을 산 디아블로 이모탈 발표 역시 팬들의 요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 아니냐는 의문이 흘러나온다.

착륙하기 전에 속도를 줄이지 않는 비행기는 없다. 어느 기업이든 포기할 것은 포기해야 하지만, 슬픈 소통 전에는 천천히 브레이크를 밟아야 한다. 많은 유저와 이별하게 된다면 회사에게도 막대한 손해지만, 이별을 통보하는 팬 입장에서도 절대 편안할 수 없다. 블리자드와 20년 이상 관계를 이어온 유저가 많다. 그들이 떠나지 않을 이유를 만들어주어야 한다.

지금이라도 액티비전-블리자드 전체가 진심을 다해 이야기하고 듣기 바란다. 한 번의 소통 실수로 모든 것이 잘못되는 일은 아니다.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명품선물이 아니라 대화 한 마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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