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이 여덟 번째 장편영화로 돌아왔습니다. 제목부터 타란티노스럽습니다. 8번째 영화인만큼 숫자 8이 들어가고, 게다가 그 8이란 숫자는 그의 데뷔작 <저수지의 개들>에서 등장하는 주요 인물 수와도 같습니다. 영화의 구조 자체도 <저수지의 개들>과 상당부분 닮아있습니다만,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에게 '어떤 영화를 연상시킨다'라는 말이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를 레고처럼 잘게 찢어서 다시 재구성하는 감독인데 말입니다. 그게 자신의 데뷔작이라고 해도 말이죠.

<저수지의 개들>을 닮았다고 하기엔 <헤이트풀8>은 그가 연출해온 영화들의 스타일이 집약된 쪽에 가깝습니다. 일단 첫째로 저 역사에 묻혀 있던 울트라 파나비전 70(Ultra Panavision 70)을 사용해 촬영하여 영화 전체에 필름 시절의 디테일과 색감이 그득그득합니다. 사무엘 L. 잭슨이 연기한 마커스 워렌이 입은 북부군 기병대 복의 노오란색 안감이 새삼 빛나 보일 정도로 말이죠.(사실 이 노란색은 '타란티노의 노란색', 킬빌의 그것을 염두에 두었다고 합니다.)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설원과 영화의 주 무대가 되는 잡화점 내부의 디테일한 모습, 종종 터지는 피칠갑에서도 그가 표현하고자 하는 필름의 질감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인물들의 수다도 여전합니다. <헤이트풀8>에선 특히나 인물 간의 관계가 아주 중요한 포인트가 되는데, 그것도 역시 대사의 몫이죠. '밀실 미스터리'에 가까운 극의 진행 덕분에 타란티노 특유의 수다가 더욱 빛을 발하기도 합니다. 각자 희노애락을 담아 자기 하고싶은 이야기를 각자 지껄이는데, 누가 하는 말이 진실이고 누가 하는 말이 거짓말인지 아무도 알 수 없죠. <헤이트풀8>에서 대사는 그의 다른 영화들보다 훨씬 적극적으로 서스펜스를 이끌어 나갑니다. 극의 무대와 이 대사들의 중요성 때문에 종종 연극처럼 보이기도 하구요.(실제로 영화를 제작하기 전 극장에서 라이브로 배우들이 관객들 앞에서 대본을 리딩하는 퍼포먼스를 하기도 했습니다.) 타란티노 특유의 말장난과 수다가 한층 더 무게를 갖고 극을 지배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영화세계가 한층 더 깊어진 느낌을 줍니다.

이런 화면과 대사의 바탕 위에서, 8명의 무법자들은 타란티노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난장판을 벌입니다. 제목 그대로 8명의 무법자들이 각자의 목적을 가지고, 혹은 우연히 '미니의 잡화점'에 모여 그들 각자의 증오를 뿜어냅니다. 남북전쟁이 끝나고 희미한 전쟁의 열기가 남아있는 삶을 살아가며 흑인은 흑인대로, 여성은 여성대로 각자의 사정 속에 얽히고 설킨 증오와 호감의 실타래가 뻗어있습니다. 이들의 관계를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세시간에 달하는 러닝타임이 언제 지나갔는지도 모르게 짧게 느껴질 정도입니다. 마치 흥미진진한 미스터리 소설을 읽고 있는 듯한 기분인데, 거기에 타란티노 감독의 찰진 영상과 엔니오 모리꼬네의 오리지널 스코어가 음산하게 깔리고 명배우들의 연기가 올라탑니다. 이만한 즐거움이 어디있겠습니까?

사실 이 영화에서 가장 흥미진진한 부분은 각 인물들이 서로를 증오하는 이유입니다. 결말엔 소위 추리의 '정답'같은 이유가 밝혀지긴 하지만, 이 영화에서 중요한 '왜'는 이런 일들이 벌어진 근본적인 이유가 아닐 것입니다. 그들이 서로 증오하는 이유는 아주 원초적인, 피부색과 성별 같은 것입니다. 그들이 어떤 이유로, 어떤 음모로 이 곳에 모인 지와는 별개로 말이죠. 와이오밍의 한 구석에 눈보라 속에 갇힌 이들에게 소위 '문명사회'의 정의는 일찌감치 물러나고 그 자리를 '개척지'의 정의가 차지합니다. 흑인이라서 증오하고, 백인이기 때문에 증오하며, 여자라서 때리고, 멕시코인이라서 개와 동급으로 취급하고, 못생긴(험상궂은) 외모 때문에 의심을 받습니다. 극 중 유일한 여성인 '데이지 도마그'가 유독 심한 린치를 당하긴 하는데, 여성 학대에 대한 도를 넘은 묘사라기 보단 오히려 그런 폭력에도 굴하지 않는 데이지의 성격을 더 잘 부각시키는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그녀에겐 거의 물리적인 폭력으로만 묘사되지만 나머지에게 서로 가하는 혐오도 그것 못지 않게 폭력적이죠.(아무리 그래도, 제니퍼 제이슨 리의 연기는 대단했습니다.)

사실상 밀실에 갇힌 이들은 기존에 사회에서 받았던 차별이나 대우를 떠나 동등한 위치에 서 있습니다. 문에 남는 건 역사가 아닌 그들 서로가 가진 원초적인 요소입니다. 덕분에 이 이야기는 미국 남북전쟁 직후의 시기를 다루고 있지만 시대를 뛰어넘어 어디에나 적용할 수 있는 것이 됩니다. 실제로 이 영화를 보고 있자면 자신이 어떤 '혐오'에 대해 무감각하고, 어떤 혐오에 대해 민감한지 판별 할 수 있는 리트머스지를 머리에 대고 있는 느낌이 듭니다. <바스터즈>와 <장고>(부제는 생략하겠습니다.)에서 역사적인 사실을 다루면서도 '나쁜 놈들을 제대로 박살내보자'라는 것에 그쳤다면, <헤이트풀8>은 밀실이라는 무대를 만들어내 시공간을 뛰어넘어 현재에도 유의미한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혐오란 무엇에서 비롯되는 것인가?'

타란티노 감독의 여덟번째 영화는, 여러모로 의미있는 영화로 보입니다. 그는 그에게 쏟아지는 비판을 곱씹을 줄 알고, 어디에도 없는 스타일을 고수하면서도 영화적으로 늘 발전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헤이트풀8>이야말로 여지껏 그가 보여준 필모그라피의 엑기스가 아닌가 싶은데, 그의 기존 영화들에서 흥미있었던 점들이 적재적소에 박혀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저수지의 개들>의 찰진 대사들, <펄프 픽션>의 스타일, <바스터즈>의 서스펜스, <킬빌>의 화끈함, <데쓰 프루프>의 복수의 쾌감 - 같은 것들이 어쩜 이렇게 잘 섞어놨나 싶을 정도로 녹아 들어 있죠. 게다가 그의 전작들을 다 씹어먹을 정도로, 엄청나게 재미있습니다! 3시간에 달하는 러닝타임동안 시간이 줄어드는게 아쉬울 정도로 말이죠. 만약 정말 그가 10편의 영화를 끝으로 연출을 하지 않게 된다면, 그의 영화를 동시대에 극장에서 만날 수 있었던 것이 인생에 몇 안 되는 행운이 아닌가 싶습니다. 다른 건 다 둘째치고 재미로만 따져도 말이죠. 제발, 연출을 그만둔다는 그 말을 번복하시길!

★★★★☆

저작권자 © 게임인사이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